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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점 명품 재고, 백화점·아울렛서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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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코로나 쇼크' 호소에
관세청, 한시적 판매허용 추진


정부가 면세점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재고를 한시적으로 백화점, 아울렛 등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파산 위기에 몰린 면세점사업자들의 숨통을 터주기 위한 조치다. 이 같은 방안이 시행되면 면세품이 일반 유통 경로를 통해 판매되는 최초의 사례가 된다.

16일 면세점업계에 따르면 롯데 신라 신세계 등 국내 주요 면세점사업자와 한국면세점협회, 관세청 관계자들은 지난 7일 회의를 열어 ‘보세물품 판매에 관한 주요 의견 사항’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면세점업계는 팔리지 않고 쌓여가는 재고를 처리할 수 있게 보세물품 판매 규정을 완화해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재고 면세품을 통관을 거쳐 내국인에게도 팔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팔리지 않고 남은 면세품은 현재는 전량 소각하거나 폐기해야 한다. 면세점은 오래된 물건을 처리해서 좋고, 국민은 저렴한 가격에 면세점 재고를 구매해서 좋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업계는 또 중국인 보따리상(따이궁) 등 해외 소비자가 면세품을 구입해 곧바로 국제우편 등을 통해 해외로 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이궁이 출국하지 않고도 물품을 반출하면 입국과 출국 시 각각 14일간의 자가격리 의무 기간을 피할 수 있어 면세점 이용이 더 활발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이궁은 지난해 국내 면세점 매출의 70%를 차지한 ‘큰손 고객’이다.
면세점 매출 '반의 반토막'…창고엔 산더미 명품 재고

국내 한 대형 면세점 물류책임자는 요즘 빈 창고를 알아보는 것이 주된 업무다. 기존 물류센터가 포화 상태여서 더 이상 상품을 놓아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장사가 잘돼서 물건을 쟁여 놓은 것이 아니다. 팔지 못해 넘쳐나는 것들이다. 팔리진 않는데 이전에 주문한 상품은 들어온다. 이런 상황이 벌써 두 달째다. 주요 면세점들의 물류센터 가동률은 이달 들어 150% 안팎까지 치솟았다. 이 면세점 관계자는 “물류센터 통로와 하역장에까지 상품을 쌓았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공터에 놓아야 할 판”이라고 하소연했다.

판매 못하는데 재고는 늘어

면세점 재고 문제는 지난 2월부터 본격화됐다. 대구·경북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면서였다. 외국인 관광객이 급감하기 시작했고, 내국인의 해외여행도 끊겼다. 면세점을 이용할 수 있는 소비자는 사라졌다. 면세점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면세점의 2월 매출은 1조1025억원. 전달(2조247억원) 대비 반토막 났다. 3월에는 또 그 절반 가까이가 사라진 것으로 업계는 추정했다. 1조원대가 깨졌다는 얘기다. 이달 들어선 ‘10분의 1토막’ 수준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그러자 재고 문제가 터졌다. 면세점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면세점 사업자들은 직접 물건을 구입해서 판매한다. 수요를 미리 조사해 팔 물건을 주문하고 창고에 들어오기까지 3~6개월이 걸린다. 현재 입고되는 상품은 최소 3개월 전에 주문한 것이다. 판매가 안 돼도 물건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면세점과 비슷한 상품을 판매하는 백화점, 아울렛은 다르다. 물건을 사서 팔지 않는다. 입점 브랜드가 알아서 판매한다. 마케팅이나 매장 관리는 함께 하더라도 재고는 각 브랜드 책임이다.

재고품을 처리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백화점, 아울렛은 재고가 발생하면 팩토리 아울렛 등 더 싸게 판매하는 곳에 보낸다. 그래도 남으면 직원들과 협력사에 ‘떨이 상품’으로 처분한다. 면세점은 다르다. 면세 혜택을 받은 제품은 시중으로 유통되지 못한다. 반품하지 못한 것은 전부 폐기·소각해야 한다.

면세점 재고는 엄청나다. 롯데면세점을 운영하는 호텔롯데의 작년 말 기준 재고자산은 1조3275억원이다. 호텔신라(8493억원)와 신세계면세점(6369억원), 현대백화점면세점(1197억원) 등도 수천억원대 재고자산을 보유 중이다. 이 가운데 유행이 지나 제값을 못 받는 패션 상품, 유통기한이 임박한 화장품과 식품 등이 가장 ‘골칫거리’다. 이런 ‘악성 재고’가 롯데, 신라, 신세계 등에만 각각 500억~1000억원어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면세점산업 지원 공감대

면세점이 재고 상품 유통을 더 활성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 면세점 관계자는 “2017년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이후에도 요청한 바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면세점들은 ‘코로나19 비상 상황’임을 내세워 이번에도 다시 건의했다. 관세청의 태도는 이전보다 훨씬 유연해졌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전했다.

국내 면세점이 세계 최고 경쟁력을 보유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제너레이션리서치에 따르면 2018년 한국 면세점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22.3%다. 2위 중국(9.4%), 3위 미국(5.7%) 등과 격차가 크다. 작년 국내 면세점들이 벌어들인 매출은 총 24조8586억원에 달했다. 전년 대비 약 31% 늘었다. 제조업을 제외하고 압도적 1위인 서비스산업은 면세점이 유일하다.

소비자도 혜택

면세점 재고품이 일반에 풀리면 소비자도 혜택을 볼 수 있다. 면세점과 관세청은 최소 3년 이상 된 재고 중 유행이 지나 처리가 어려운 것을 우선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패션, 잡화, 시계, 액세서리 등이 해당한다. 화장품과 식품은 통관 과정을 다시 거치는 것이 까다로워 논의에서 제외됐다. 관세, 부가가치세 등의 세금을 매긴다 해도 가격은 면세품 못지않게 저렴할 전망이다.

백화점, 아울렛이 판매처로 거론된다. 롯데와 신세계는 계열사로 백화점, 아울렛, 쇼핑몰을 다수 거느리고 있어 시너지 효과도 크다. 한 유통사 관계자는 “백화점, 아울렛에 입점하지 않은 브랜드를 우선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매장 형태로는 ‘팝업스토어’가 제시됐다. 이 유통사는 이 방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면세점과 백화점 관계자가 모여 이미 여러 차례 회의를 했다.

판매에는 면세점 판매사원들이 동원될 전망이다. 이들은 현재 상당수가 휴직하고 있다. 매장에 있어도 사실상 업무가 없다. 이들을 백화점, 아울렛으로 보내면 직원들도 일거리가 생겨 ‘윈윈’할 수 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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