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트남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한국과 경제 교류가 많은 국가들이 잇달아 ‘한국인 입국 금지 및 제한’에 나서면서 한국 기업의 해외 사업에 비상등이 켜졌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의 해외 출장·미팅, 현지 마케팅 행사는 사실상 완전 중단됐다. 국내 공장이 줄줄이 ‘셧다운(일시 가동 중단)’되는 가운데 해외 공장 완공 일정마저 지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탓에 안팎으로 손발이 묶인 기업들이 골병이 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외교부에 따르면 한국인 입국을 금지·제한한 곳은 중국 베트남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81개국에 달한다. 한국에 빗장을 걸어닫는 국가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여서 국내 기업의 해외 사업 차질은 물론 ‘수출 한국’의 입지도 위태로워졌다는 분석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내 매출 상위 10대 기업의 해외 매출 비중은 65.9%에 달했다.
기업들은 특히 베트남이 한국인에 대해 강력한 입국 제한 조치를 하자 큰 충격에 빠졌다.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며, 8000여 개 기업이 진출해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 예정이던 모바일 연구개발(R&D)센터 착공식을 취소했다. 이 행사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참석할 계획이었다.
국내 기업의 해외 출장도 막혔다. 현대자동차는 지난달 27일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와 수소에너지 분야 협업을 위해 현지에 직원을 보냈지만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다. 대기업 관계자는 “한국인과의 만남 자체를 꺼리는 거래처가 많아 해외 주재원들도 난감해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 2공장, LG디스플레이의 광저우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공장의 완공 및 양산 일정도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의 장비 운반과 협력사 직원 투입 등이 차질을 빚고 있어서다.
삼성, 하노이 R&D센터 기공식 취소…LGD, 광저우공장 양산 차질
“매출의 3분의 2가 끊기게 생겼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한국발 입국자를 금지·제한하는 ‘코리아 포비아(공포증)’가 확산하고 있다. 해외 출장길이 막히면서 기공식과 고객사 미팅이 취소되고, 가동을 앞둔 공장의 양산도 지연될 처지에 놓였다. ‘코로나19발(發) 셧다운(일시적 가동 중단)’에 따른 국내 공장 생산 차질 속에 매출 비중이 높은 해외 사업까지 타격을 받으면서 한국 기업들이 사면초가로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대투자국 韓 입국 막아
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달 29일로 예정됐던 베트남 하노이 연구개발(R&D)센터 기공식을 취소했다. 1억6000만달러(약 2000억원)를 들여 모바일 R&D센터를 짓는 사업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주요 경영진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에서 모바일 제품을 연간 1억7000만 대 생산하고 있다. 2017년 기준 삼성전자와 계열사들이 베트남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달한다. 이런 삼성전자도 베트남 정부가 코로나19 확산 우려를 이유로 한국인의 무비자 입국을 중단하자 기공식도 못한 채 첫 삽을 떠야 했다.
올해 초 하노이에서 부품공장 가동을 시작한 한 중견기업 대표는 “한 달에 보름가량 하노이에 출장을 가 공장 관리를 하는데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가다. 누적 투자액이 570억달러(약 69조원)에 달한다. 베트남 남부 바리어붕따우성에 1조원을 투자해 폴리프로필렌 공장을 짓고 상업가동을 시작한 효성도 원료 수급 등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가 지난달 29일 인천을 출발해 하노이로 가던 아시아나 OZ729편에 대해 하노이 노이바이공항 착륙을 불허하면서 이 항공기는 이륙 40분 만에 인천으로 긴급 회항했다.
中 신공장 가동 차질 우려
중국은 광둥성 광저우와 산시성 시안, 장쑤성 난징·쑤저우 등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한국발 입국자에 대해 자가격리(14일) 등 입국강화 조치를 취했다. 현지에 공장을 둔 한국 기업들은 애를 태우고 있다. 광저우 LG디스플레이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공장은 올해 1분기(1~3월) 가동 계획에 빨간불이 켜졌다. 막바지 수율(투입 원자재 대비 완제품 비율) 개선 작업을 진행 중이었지만, 한국인 엔지니어들의 출장이 차질을 빚고 있어서다.
세계 3위 스마트폰 시장인 인도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중심국인 말레이시아 등도 한국발 입국을 제한해 기업들의 손발이 묶일 처지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조선소에 지분을 투자한 현대중공업과 지하철 공사를 맡고 있는 삼성물산 등도 입국제한에 따른 비상 계획을 점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소비자가전(CE) 부문을 중심으로 이달 말까지 해외 출장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 일부 가전 신제품의 해외 출시 행사도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신제품 판매가 본격화하는 시기인 3월 출장 중단은 뼈아프다”고 했다. 기업들은 산업통상자원부에 한국인 격리 완화 등을 해외 출입국당국과 협의해 달라고 건의했다. 출국에 앞서 한국 공인의료기관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아니라는 보건증을 발급받으면 해외 입국장에서 체온 측정 등 간단한 검사만 받고 격리 조치는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한국 기업 신뢰 ‘흔들’
기업들은 코로나19 사태가 한국 기업의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북핵 우려로 한국 기업의 주가가 상대적으로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되는 것처럼, 국가 차원의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한국 기업에 대한 평판이 덩달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 건설 수주전에 뛰어든 국내 한 대형 건설회사 관계자는 “중동쪽 발주처가 최근 미팅에서 ‘전염병(코로나19)이 창궐한 한국이 정상적으로 공사를 맡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해외 출장이 막히는 것보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이미지가 훼손돼 향후 입을 타격이 더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황정수/김보형 기자/김정은 기자/하노이=박동휘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