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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해운업 저물면 무역 강국이 되나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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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해운업계 원로 정남돈 선생이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 이후 본지 기자에 보내온 글입니다. 정남돈 선생은 1990년 조양상선이 국내 최초로 세계일주항로를 개척할 때 개발팀장을 맡아 활약했고, 이후 세양선박 대표 등을 지냈습니다. 모바일한경은 앞으로 정 선생이 보내온 해운업 관련 기고를 연재할 계획입니다.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 서언

우리는 용감·무식하게 원양 해운사 하나를 침몰시켰다. 수치스러워 바다 물밑으로 피해야 할 정도다. 늘 같이 지내던 친구를 잃은 것처럼 바다를 보면 황량하기 짝이 없다. 문제는 지금 이로 인해 꼬부라지는 경제 상황이다. 성장률 2%도 달성하기 버겁다는 언론 보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정부 책임자가 나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처방전도 없고 대책도 별로 없이 추경예산만 들먹여 의문만 키웠다.

어느 화주는 “눈 비비고 일어나 보니 외국 원양선사들이 미국행 컨테이너 한 개당 해상운임을 750달러에서 1500달러로 점프시켰다”고 투덜댄다. 실제로 완전 두 배로 튀었다. 기존 운임보다 추가로 톤당 3달러가 올랐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수출 마진은 이미 없어졌고 이대로 가면 적자를 많이 보니 이 사업도 ‘서서히 종말이 왔다는 신호 같다’고 했다.

수출이 뭔가? 우리 경제 역량의 엑기스를 포장해 외국에 파는 것이다. 여기서 마진이 없다면 이곳 공장을 멈추어야 한다. 생각지도 않았던 해상운임에서 이렇게 느닷없이 골병이 들 줄 몰랐을 것이다. 문제는 미주로 가는 외국 해운선사들의 뻣뻣한 영업태도다. 그 운임으론 실을 장소가 없다고 버티니, 저 건너 수화주와 인도 날짜 약속도 물거품이 된다. 이래저래 너도 나도 망신 덩어리가 됐다. 무슨 재주로 이를 극복해야 하나. 정부 책임자는 이번 해운 구조조정에 대해 “조금만 두고 보면 이해할 것”이라는 아리송한 말만 남겼다. 모두 추측을 해 봐도 그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갸우뚱한다. 당장 급한 것은 스페이스(선복) 구하는 일인데...

혹자는 반발한다. 우리 손에 있던 한진해운 선복 60만TEU가 사라졌는데. 그리고 여분으로 떠도는 다른 선복이 한국 화주를 위해 제공될 것이란 보장도 없는데. ‘차후에 이해할 것’이라고? 말도 안 돼는 태평스런 소리를 하네. 당장 수출이 급한 사람들에게 잠꼬대를 하는가 하고 반문한다.

한국의 수출입 역량이 연간 1조 달러 크기인데. 우리 경제규모는 감안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을 부족한 선복에 대한 대안은 내놓지 않고 봉창 두드리는 소리만 하고 있으니 답답한 것이다. 점점 팍팍해질 물류전선이 걱정이다.

2. 현실은

지금 부산항의 수출입 동향을 보면, 연말연초의 최고 무역성수기가 이 정도라면 여러 방면에서 위축되거나 감소한 추세가 분명할진데. 이를 간과하고 대체 뭘 보고 경제 동향을 수집하는지 의문이다. 큰 해운사가 문 닫고 난 후 무역이 따라 문 닫을 처지인데. 그 영향은 파악하지 않고 조금 올랐다고 언론 플레이를 하지 말라고 항만업계가 스스로 말하고 있다.

오르는 운임, 패배한 한국 상선대, 의기양양한 외국 선사... 모두 가슴속에 피 끓는 응어리 만 쌓이는데 태평스런 고전 염불만 하고 있으니 그걸 보고 참을 일인가. 정말로 현실과 동떨어진 관료의 동문서답 어법이다.

이것은 단지 한 회사가 겪는 문제가 아니다. 컨테이너 운송비를 올려 주고 마진도 없이 손실로 몰리는 상황이라면 우리 제조업 수출은 곧 경쟁력을 잃을 것이다. 결국 인건비가 더 저렴함 국가로 이동할 것이다.

지난 1970~80년대 많은 중소기업 공장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민주화 열기에 모두가 저임금에 대한 불만을 분출했다. 참으로 격렬했다. 공장의 책임자나 주인들은 직원들 앞에서 인민재판으로 곤혹을 치렀다. 기술자도, 여공들도, 사장도 함께 우는 시절이 있었다.

사정은 이랬다. 당시 한국·일본 항구에서 미국 가는 컨테이너선은 부산에 기항하지 않았다. 모두 피더선으로 도쿄항까지 실어 날라 그곳에서 환적을 해야 했다. 일본에서 미국가는 운임 개당 1200달러에, 피더선 환적과 하역비 등을 합쳐 추가로 650달러가 더 들었다. 1850달러를 모두 지불해야 미국 수출이 완료되는 셈이다. 이 같은 물류비 낭비가 회사재정을 어렵게 했다. 열심히 저임금으로 일한 공장 사원들은 이런 사정으로 보수인상이 없으니 공장바닥에서 고함치며 몸부림쳤다. 이런 제조기업이 그 당시는 부지기수였다. 텍스타일 신발, 가발 등 주력수출 품목은 이런 한계기업들이었다. (2편에서 계속)

오늘의 신문 - 2024.05.08(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