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의 뉴스레터

이학영
9월에 접어들면 저는 가벼운 마음의 몸살을 앓습니다. 뉴욕에서의 특별한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져서입니다. 마라톤 마니아들이 ‘버킷 리스트’로 꼽는다는 정규 마라톤대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매년 9월11일, 뉴욕의 브루클린과 맨해튼 섬을 연결하는 배터리터널 입구에는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이 몰려듭니다. ‘그라운드 제로(‘9·11 테러’로 사라진 월드트레이드타워 터)’까지 5㎞ 코스를 달리는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입니다. 월드트레이드타워 입주자들을 구조하다 순직한 뉴욕소방청의 스티븐 실러 소방관이 달렸던 구간을 체험하는 행사입니다.

실러 소방관은 사고가 나던 시간, 비번(非番)으로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월드트레이드타워가 화염에 휩싸였다는 긴급 뉴스를 듣자마자 즉각 소방장비를 챙겼습니다. 그리고는 가족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사고현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사고로 인해 배터리터널 통행이 차단되자, 75파운드(약 34㎏)에 이르는 장비를 둘러메고 월드트레이드타워까지 달려갔습니다. 다섯 아이의 아버지였던 실러는 끝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사고현장을 수습하다 목숨을 잃은 343명의 소방관 가운데 한 명이 됐습니다.

목숨조차 아끼지 않은 투철한 사명감을 발휘한 ‘제복 입은 공직자’의 숭고한 순직에 고개가 깊이 숙여지면서, 그런 희생을 잊지 않고 새기기 위해 수만 명이 해마다 추모행사를 갖는 미국 사회가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스티븐 실러’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순국-순직을 추모하는 행사가 제대로 열리는 날을 기다립니다.

한국경제신문 편집국장
이학영 올림
이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