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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용접' 이끄는 여성 CEO…"우아한 용접 불꽃, 불멍 같아" [강경주의 IT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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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의 IT카페] 77회

일흥의 이지현 대표·이정현 연구소장 인터뷰
"용접이 험하다는 건 편견…고도의 섬세함 요구"
외국에 의존하던 용접 기자재 차례로 국산화 성공
"요즘 여성 용접사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
"경제의 근간되는 용접에 투자와 관심 늘었으면"


땀에 젖은 작업복, 뜨거운 불꽃, 매캐한 연기 등 용접은 일반인들에게 대표적인 3D산업으로 인식된지 오래다. 남자들도 버티기 어려운 용접 바닥에 평생을 바친 여성들이 있다. 국내 대표 용접용 기자재 생산기업 일흥을 이끄는 이지현 대표(45)와 이정현 연구소장(43)이 주인공이다. 친자매 사이인 이 대표와 이 소장은 31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용접이 험한 일이라는 건 편견"이라며 "그 어떤 산업보다 고도의 섬세함이 요구되는 가장 예술적인 직업"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일흥은 어떤 기업?
일흥은 고(故) 이건국 창업주가 1976년 부산 서면 공구거리에 터를 잡으면서 시작됐다. 1977년 '무궁화표 용접면'으로 불리는 '벌커나이즈드 화이바(Vulcanized fibre) 용접면'을 출시하면서 기반을 다졌다. 용접면은 작업자 얼굴에 튀는 불꽃을 막기 위해 마스크처럼 쓰는 안전용품으로,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을 비롯해 산업 현장 전반에 두루 쓰인다.

과거 용접면은 이음새 부분이 전기 절연이 잘되지 않아 용접사들은 늘 감전 위험에 노출된 채 작업을 했다. 일흥의 용접면은 이음새 없이 일체화된 몸체를 구현했고, 혁신성을 인정받아 국내 용접 분야 최초로 한국산업표준(KS) 인증을 받았다.

이 대표는 "용접 기자재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마분지로 면체를 만들고 이음매 부분을 리벳(금속 전용 굵은 못)으로 박은 용접면을 처음 만들었다"며 "지금도 일흥의 용접면은 대부분 용접사들이 사용해 '국민 용접면'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일흥의 무궁화표 용접면은 국내 용접면 점유율 70%를 웃돈다.

일흥은 용접면 외에도 외국에 의존하던 용접 기자재를 국산화시켰다. 내열 싱글케이블, 용접 보안면, 플렉시블 토치바디(flexible touch body), 용접토치, 흄(Fume·용접시 검게 훈증된 가스와 매연) 집진 시스템, 웰딩호스 등 다양한 제품군을 선보이면서 용접 현장의 현대화와 안전화에 기여했다.


특히 일흥의 싱글케이블은 한국이 용접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싱글케이블은 용접기에 연결하는 케이블 하나에 전력선, 가스선, 컨트롤선을 모두 넣은 제품이다. 이 대표는 "조선소는 야드(Yard)가 워낙 넓은 탓에 선이 길어질 수밖에 없어 제품 손상과 안전 문제가 늘 제기돼 왔다"며 "일흥의 싱글케이블은 3가지 선을 하나의 케이블에 넣어 안전과 수명을 다 잡았다"고 설명했다. 해외 조선소에서는 지금도 각각의 선을 따로 쓰는 곳이 대부분이다.

용접은 대표적인 전방 산업이어서 조선 경기가 안좋을 때 실적이 주춤하기도 하지만 이 대표는 실적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용접 없인 대한민국 제조강국'도 없다는 신념을 갖고 불황일 때 더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과 현재 총 직원 40여명을 거느린 국내 대표 용접기자재 회사로 성장했다. 지난해 매출은 138억원을 기록했다.
"용접이 험한 일?…도리어 여성에 유리한 부분 많아"
2000년 일흥에 입사한 이 대표는 선친이 세상을 떠난 2016년 대표 자리에 올랐다. 여성이 무슨 용접을 하느냐는 핀잔과 편견과의 싸움이 계속됐다. 하지만 한 번도 용접에 뛰어든 걸 후회한 적이 없다. 이 대표는 "용접이 꼭 남성 영역이라곤 생각지 않는다"며 "도리어 워낙 섬세한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에 여성이 유리한 부분이 많다"며 웃음을 보였다.

이 소장 역시 "요즘엔 여성 용접사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며 "전문성을 쌓을 수 있고 경력단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용접의 매력이 무엇이지 묻자 "안정감을 준다"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용접 불꽃을 불멍에 비유한 이 소장은 "용접을 할 때 불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열악한 용접 환경이나 잘 갖춰지지 않은 장비 때문에 힘들지, 용접 그 자체는 정말 예술적이고 고차원적이고 우아한 직업"이라고 치켜세웠다.


용접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까. 이 소장은 "처음에는 '아버지는 왜 용접 회사를 물려줘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며 "언니에게 투정을 많이 부렸다"고 농담을 던졌다. 이어 "40명이 넘는 직원들이 고충을 털어놔도 대표님이 다 포용해 준다"며 "이제는 용접이 국가 경제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용접이 천직이라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동생을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이 대표는 "편하게 살려면 다른 길을 선택했겠지만 기업을 운영하는 것만큼 사회에 봉사하는 게 없는 것 같다"며 "나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용접을 사랑하고, 용접에 헌신하는 동생과 우리 직원들을 사랑한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흄 집진 시스템을 개발한 이유
이 대표는 흄 집진기 판매량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매출이 아니라 용접사들의 건강과 안전한 작업 환경을 위해서다. 용접을 하다 보면 고온의 아크열(Arc·전기 불꽃)로 금속이 증발하면서 '흄'이라는 유해가스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현장에는 덕트(Duct·유해물질 배출통로)와 같은 집진 시설을 설치해 가스나 먼지를 제거하지만 중금속 연기는 무게 때문에 가라앉아 용접사가 거의 다 마시게 된다.

일흥은 5년간의 연구 끝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흄 집진 시스템을 개발했다. 불꽃을 내는 토치 입구에 집진 장치를 달아 공기 중에 유해가스가 흩어지는 것을 최소화했다. 집진 구간 거리도 조절할 수 있고 토치마다 다른 형태로 만들어 부착할 수 있기 때문에 적용성도 뛰어나다는 설명이다.

이 소장은 "흄에 포함된 유해금속과 가스에 장시간 노출 시 각종 호흡기 질환과 난치성 질병에 걸릴 수 있다"며 "그간 고정식 국소 배기장치에만 의존했지만 일흥의 흄 집진 시스템이 대안이 될 수 있는 만큼 기업들이 작업자의 건강을 위해 설치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두 자매는 용접 산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이 소장은 "우리나라가 조선강국 지위를 잃지 않으려 조선업을 떠받치는 용접업의 고도화가 필수로 진행돼야 한다"며 "한국이 최고의 배를 만들 수 있도록 일흥이 최고의 용접 기자재를 개발하겠다"고 했다.

이 대표는 "조선, 자동차, 건축 등 국가 경제의 중심이 되는 분야에 용접이 반드시 쓰인다"며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의 근간이 되는 용접에도 국가 차원의 투자와 관심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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