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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죄" 3년 뒤 돌변한 일본…"이게 좋은 친구인가" [대통령 연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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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연설 읽기 ⑥] 8·15 경축사로 본 한일 갈등의 역사

5억달러에 식민 배상 포기한 박정희
“국가이익 위한 불가피한 결단이었다”
양국관계 주춧돌 ‘김대중-오부치 선언’
문재인, 日 경제보복으로 ‘최악 갈등’
“한국의 성장 사다리 걷어차지 말라”

매년 8월 15일 발표되는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는 일본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과거사를 둘러싼 오랜 갈등 국면에서 정부의 국정 기조가 확연히 드러나는 탓에 단어나 표현 어조같은 수위가 최대 관심사다. 윤석열 대통령도 오는 15일 제77회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취임 후 첫 경축사를 내놓는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한·일 관계 개선에 강력한 의지를 표명해왔던 만큼 이번 연설문에서 어떤 대일(對日) 메시지를 내보일지 관심이다. 대통령의 경축사를 통해 1945년 해방 이후 냉·온탕을 오갔던 한·일 관계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일본이 걸핏하면 들고나오는 ‘한일청구권협정’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5년 체결됐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5억달러를 받는 대신 식민 지배에 대한 모든 배상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이 돈을 경제 개발 자금으로 충당하고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해(1965년) 경축사에서 “국가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결단이었다”며 “이번 타결로 하나의 역사적인 전기를 만드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강조했다. 1974년 청구권 신고를 시작으로 보상 절차에 들어간 박 정부는 그해 경축사에선 일본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과했다" "안했다"…정권 바뀔때마다 냉기류
1990년대 들어 일본이 위안부 동원 과정에서 일본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와 식민지 지배의 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가 나오면서 양국 관계는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룬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 5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두 나라가 불행했던 과거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미래지향적으로 발전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과거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호적인 분위기는 석 달을 못 갔다. 일본 당국자들이 “한일 합방으로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는 망언으로 한국을 자극했고, 김 전 대통령도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경고하면서 관계는 틀어졌다.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계승을 약속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양국 관계 개선의 모범 답안으로 회자된다. 김 전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와 해묵은 갈등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자는 파트너십을 선언한다. 이 선언문은 일본이 처음으로 한국을 지칭해 사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러나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취임하면서 일본이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담은 교과서를 발표, 관계가 다시 경색됐다. 김 전 대통령은 “3년 전 일본 정부는 공식적 문서를 통해 과거를 사죄했다”며 “그런데 최근 일본 내 일부 세력에 의해 역사를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한일 관계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끼친 수많은 가해 사실을 잊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들과 어떻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나”라고 일침을 가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집권하는 내내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한국을 비롯해 주변국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 즈음 일본의 우경화 기조가 짙어지면서 우익 세력의 역사 왜곡 발언도 잦아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3년 경축사에서 “일본은 과거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를 뒷받침하는 실천으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일을 반복할 의사가 없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며 “독도, 역사 교과서, 야스쿠니 신사참배,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그것이다”고 강조했다.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간 나오토 총리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양국은 화해 무드가 조성된다. 일본 측은 조선왕실의궤 등의 문화재 반환 의사도 밝혔다. 이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근 일본 정부는 총리 담화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민을 향해 한국민의 뜻에 반한 식민 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했다. 저는 이것을 일본의 진일보한 노력으로 평가하고자 한다”며 “역사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도 함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한국과 일본이 가야 할 바른 길”이라며 화답하는 내용을 경축사에 담았다. 역시나 해빙 분위기는 2년을 못 갔다. 2012년 아베 신조 총리가 재집권하면서 초·중·고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가르치도록 학습지도요령을 개정했기 때문이다.
"역사가 가려지나"라던 朴 위압부 합의’ 후폭풍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아베 전 총리는 2015년 8월 종전 70주년 담화문에서 더는 과거사에 대해 사죄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담화문 발표 다음 날 박 전 대통령은 “역사는 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산증인들의 증언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조속히 합당하게 해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해 12월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가 10억엔을 출연하는 대신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종결’을 합의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졸속으로 만들어졌다는 비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일 갈등의 큰 불씨로 남아있다.



위안부 합의를 파기한 문재인 정부는 국정과제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내걸었고 양국은 급속한 냉각기를 맞았다. 2019년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해 수출 규제가 시작되면서는 ‘노재팬(No Japan)’ 운동이 확산하는 등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고통에 관해) 밝혀진 사실들은 그것대로 풀어나가고 미흡한 부분은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마저 해결해야 한다”, 2018년 “광복은 결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며 여러 차례에 걸쳐 과거사 청산을 요구했다. 경제보복 이후에는 “먼저 성장한 나라가 뒤따라 성장하는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된다”(2019년)고 경고하기도 했다.

서희연 기자 cub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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