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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야해, 근데 아름다워"...몰락한 男 승부수에 '발칵'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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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뭘 했냐고? 고개를 들어 로마를 보라"
로마를 만든 '천재 공간 디자이너'
잔 로렌초 베르니니(Bernini)·下


“건물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건물을 가리켰습니다. 간밤에 건물 외벽을 따라 생겨난, 뱀처럼 기어가는 듯한 끔찍한 균열. 그것도 보통 건물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 세계의 심장, 성 베드로 대성당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겁니다.

만약 무너진다면 그야말로 대참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 수군거림은 곧 확신에 찬 외침으로 바뀌었습니다. “건축도 모르는 그놈이 대성당을 무너트린다!” 그 비난의 대상은 공사 책임자,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한 민심은 극도로 나빴습니다. 베르니니가 유부녀와 불륜을 벌이고, 그 불륜 상대와 자기 동생의 간통을 목격하자 동생을 쇠 지렛대로 때려죽이려 했던 ‘막장 드라마’가 바로 얼마 전 일이었으니까요.

“천재 예술가는 사생활이 더러워도 봐줘야 한다”는 황당한 이유로 용서를 받았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본업인 예술과 건축에서마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단호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탑을 당장 철거하라. 관련 비용은 베르니니가 지불하라.” 예술가로서 가장 빛나야 할 40대의 나이에, 베르니니는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습니다.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베르니니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어이 부활합니다. 역사상 가장 성스러우면서도 외설적인 걸작 하나를 만들어낸 덕분이었습니다.

조각의 천재였던 그는 왜 건축에 손을 댔다가 한순간에 무너졌던 걸까요. 그리고 그를 구원한 문제의 걸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금 이탈리아 로마의 모습을 만든 천재 예술가, 베르니니의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너, 건축 배워라”
10대 때부터 천재적인 조각 실력으로 로마를 뒤흔들었던 베르니니. 1623년, 새로 즉위한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스물네 살의 베르니니를 부른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과 만날 수 있다는 건 그대의 영광이다. 하지만 내가 그대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그보다 더 큰 행운이다.” 그리고는 명령했습니다. “이제부터 건축을 공부하라. 그대의 건축 실력을 조각 실력만큼 키워라.” 한 마디로, ‘앞으로 너에게 건축을 맡길 테니 열심히 공부해 두라’는 말이었습니다.

교황처럼 높디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 왜 한낱 젊은 예술가의 진로를 몸소 정해준 걸까요. 교황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바람 앞에 가톨릭의 권위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맞서 교황은 가톨릭의 심장인 성 베드로 대성당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만들려 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도 성당을 보면 너무 감격해서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성당을 만들자.’

물론 이런 ‘인생을 바꾸는 예술 작품’은 돈만 쓴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젊은 천재 베르니니라면 그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게 교황의 판단이었습니다.


요즘이야 건축과 조각이 완전히 다른 분야지만 당시만 해도 둘의 경계는 희미했습니다. 교황은 베르니니에게 주물 공장 감독관, 수자원 관리 감독관 같은 직책을 맡기며 그를 엘리트 건축가이자 감독관으로 키워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교황의 남자’가 된 베르니니에게 첫 번째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성당 중심의 심장부, 베드로의 유해가 잠든 그 자리 위,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바로 그곳을 장식할 거대한 청동 조형물(발다키노)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1624년 6월 교황청은 공개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성 베드로의 유해 위에 발다키노를 만들고 싶은 자는 15일 내로 설계안을 가져오라.”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의 공모 기간이 고작 보름이라니. 짧아도 너무 짧았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공모전은 이미 내정자를 정해 놓은 ‘무늬만 공모전’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당선자는 베르니니였습니다. 교황의 귀띔을 받은 덕에 일찌감치 멋진 설계를 준비할 수 있었으니까요. 초짜 건축가 베르니니는 곧바로 공사에 착수해 발다키노를 멋들어지게 만들어냅니다.

어쨌거나 결과가 너무 좋았습니다. ‘낙하산’인 그에게 눈총을 보내던 로마 시민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차가운 증오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베르니니의 가장 큰 라이벌이자 또 다른 천재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1599~1667)였습니다.
“건축 모르는 놈”…베르니니의 굴욕
잠깐 성 베드로 대성당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성당의 재건축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1506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비롯한 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여기에 손을 보탰고, 프로젝트 책임자는 시간이 흐르며 계속 바뀌었습니다.

베르니니가 교황의 명령으로 건축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공사가 120년 가까이 진행된 상태. 당시 재건축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마데르노라는 건축가였습니다. 그를 조수이자 제자로서 오랫동안 보좌해온 사람이 바로 보로미니였습니다.


예술가로 출발한 베르니니와 달리 보로미니는 석공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건축적·구조적 지식과 경험이 많았고, 공학적인 기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베르니니보다 요즘 건축가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지요. 그는 경험과 천재성을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보로미니의 재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스파다 궁전의 ‘마법의 복도’.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 복도는 사람이 직접 봤을 때 37m 정도의 길이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이 복도의 길이는 겨우 8m에 불과합니다. 이런 마법은 보로미니가 끝에 배치한 조각상의 크기(실제 60cm 가량), 기둥의 위치와 높이 등을 절묘하게 배치해 눈속임 효과를 만들어낸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보로미니에게는 건축가로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성격이 괴팍하고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건축가는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반드시 건축주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교황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치 없는 보로미니는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면 내가 재건축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이어받겠지.’

그리고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스승님이 1629년 세상을 떠난 겁니다. 보로미니의 예상과는 달리, 그리고 다른 모든 로마 시민들의 예상대로, 대성당 재건 프로젝트의 새로운 총책임자는 교황의 총애를 받는 베르니니였습니다.

보로미니의 자존심은 형편없이 구겨졌습니다. ‘저 건축도 모르는 비전공자 놈이 총책임자라니….’ 큰 충격을 받은 보로미니는 얼마간 베르니니 밑에서 일하다가, 프로젝트에서 스스로 손을 떼게 됩니다.


그리고 8년 뒤. 보로미니에게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옵니다. 교황의 명으로 두 개의 종탑을 건물 위에 얹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베르니니. 하지만 첫 번째 종탑을 올린 순간, 대성당 외벽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성당 밑의 연약한 땅이 무거운 종탑을 받치지 못하고 가라앉은 게 원인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전임자(마데르노)가 기반을 잘못 다졌다’는 쪽과 ‘베르니니의 설계가 잘못됐다’는 쪽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습니다.

베르니니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전문가는 보로미니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중한 건축가들은 먼저 지반부터 살핍니다. 무턱대고 건물부터 올리다니, 말도 안 돼요.” 한마디로, 건축공학적 지식도 없는 베르니니가 억지로 공사를 진행하다 일을 망쳤다는 얘기였지요.

사실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이 사건의 책임은 전임자인 마데르노에게 있습니다. 베르니니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었고요. 하지만 보로미니는 재건축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실력 있는 건축가. 그런 보로미니가 “베르니니 잘못”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여론은 베르니니에게 책임을 묻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여러 악재가 겹칩니다. 일단 베르니니의 ‘불륜 스캔들’이 터지면서 그의 평판이 땅에 떨어집니다. 여기에 더해 베르니니에게 건축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던 든든한 후원자 우르바누스 8세까지 세상을 떠납니다. 새로 즉위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베르니니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물. 교황은 명령했습니다. “종탑을 철거하라. 그리고 관련 비용은 베르니니가 물어내도록 하라.”
천재, 다시 일어서다
로마 시민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베르니니는 이제 끝났어.”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가장 큰 ‘고객’인 교황에게 완전히 찍히고 말았으니까요.

하지만 베르니니는 자신의 출발점인 조각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부활합니다. 한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작은 예배당을 만들기 시작한 게 계기였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코르나로 예배당. 이곳에서 베르니니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가 탄생합니다. ‘성녀 테레사의 환희’입니다.

성녀 테레사는 16세기 스페인의 수녀이자 대(大)신학자입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천사에게 창으로 심장을 찔리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테레사는 엄청난 고통과 대단한 종교적 황홀감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베르니니는 바로 그 격렬한 환희를 느끼는 순간을 숨김없이 노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외설 논란’을 우려해 그 장면을 엄숙한 분위기로 묘사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는 논란을 감수하는 일종의 승부수이자,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는 지극히 베르니니다운 행동이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황홀감에 빠진 테레사의 얼굴.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테레사의 모습입니다. 테레사가 생전 공중 부양 현상을 여러 번 겪었다는 기록을 반영한 것입니다. 베르니니는 펄럭이는 옷자락을 멋지게 표현해냈고, 여기에 더해 조각의 모든 면이 부드러운 하나의 덩어리로 이어지도록 다듬었습니다. 그 후 건축가이자 ‘공간 디자이너’로서 천재성을 더했지요. 예배당 천장에서 비추는 자연광과 금빛 브론즈로 제작된 뒤쪽 구조물이 반사하는 후광. 그 덕분에 조각이 무거운 돌덩어리라는 사실은 잊히고, 대신 ‘영적인 에너지와 공중으로 떠오르는 움직임’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작품이 발표되자 베르니니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여론은 반전됐습니다. “그 조각 봤어? 역시 베르니니는 천재야.” “베르니니가 아니면 누가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겠어.” 극찬이 쏟아졌습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조각이 너무 외설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트집을 잡기에 조각은 너무 아름답고, 또 성스러웠습니다. 육중한 돌덩이가 중력을 무시하고 떠 있는 듯한 모습. 이는 종교적인 기적을 두 눈으로 체험하는 수단이자, 바로크 조각이 갖고 있는 극적인 아름다움의 정점이었습니다.

‘피우미 분수’를 제작한 건 그의 부활을 확정지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분수는 지금도 로마 관광 필수 코스로 꼽히는 나보나 광장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분수 제작을 의뢰한 건 교황입니다.


원래 교황은 베르니니에게 분수 제작을 맡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명 예술가들에게 “설계도를 내 보라”는 연락을 돌리면서도 베르니니는 쏙 빼놓았으니까요. 가장 유력한 후보는 보로미니였습니다. 하지만 베르니니는 영리한 술수를 씁니다. 자신이 제작할 피우미 분수 모양을 작게 모형으로 만든 뒤, 친한 귀족에게 부탁해 교황의 식탁 위에 올려놓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칫 교황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기도 했습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교황은 모형을 본 순간 30분 가까이 그 모형을 여기저기 관찰하며 그 아름다움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이런 설계는 베르니니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다. 모형을 안 봤으면 몰라도, 일단 봐버렸기 때문에 베르니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피우미 분수입니다. 분수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인물 조각들이 각각 배치돼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 미치는 교황의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청과 베르니니의 관계는 다시 회복됩니다. 물론 ‘꼼수’에 밀려 일감을 빼앗긴 보로미니는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보로미니는 베르니니에게 계속 밀리게 되고, 훗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처음과 끝
이 무렵, 유럽에서는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30년간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으로 막을 내린 것. 문제는 이 조약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가톨릭이 더 이상 ‘세상의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선고와도 같았습니다. 교황청의 권위는 추락했고, 가톨릭이 독점하던 막대한 종교적 수입도 개신교라는 경쟁자와 나눠야 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1655년, 새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즉위합니다. 그가 꺼내 든 카드는 ‘예술을 통한 권위의 회복’. 이전에도 비슷한 목표를 추구한 교황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해서 로마를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바꿔놓겠다는 게 교황의 꿈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황은 베르니니와 ‘드림팀’을 이뤄, 쇠락해가는 로마의 영광을 예술의 ‘장엄함(magnificenza)’으로 되살리려는 마지막 몸부림을 시작합니다.

교황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얼굴, 바로 앞 광장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성당 앞은 미로처럼 뒤엉킨 골목길과 허름한 집들로 가득 찬 무질서한 공간이었습니다. 교황은 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광장을 만들기로 합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청 1년 예산의 절반을 모두 투입해야 했으니까요. 당연히 반대는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돈이 돌면서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며 계획을 밀어붙였습니다.



무질서했던 공간은 베르니니의 손에서 광활하고 장엄한 ‘성 베드로 광장’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베르니니는 이 광장을 ‘어머니의 팔’로 설계했습니다. 284개의 거대한 기둥이 타원형으로 늘어서, 마치 어머니가 두 팔을 벌려 광장에 모인 모든 이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모습. 이는 신자들을 축복하고, 갈라선 이들을 화합시키며, 믿지 않는 이들을 돌려세우는 가톨릭 교회의 포용력과 권위를 완벽하게 구현한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광장이 외부를 향해 뻗은 가톨릭의 팔이었다면 ‘카테드라 페트리’(베드로의 의자)는 성당 가장 깊은 곳에서 빛나는 심장이었습니다. 초대 교황이었던 사도 성 베드로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나무 의자. 베르니니는 이 의자를 둘러싸는 거대한 청동 장식을 만들었습니다. 제단 위에 이 성스러운 의자와 장식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뒤 창문에서는 천상의 빛이 쏟아져 들어와 금빛 광선과 구름 조각 사이로 퍼져나갑니다. 입구인 광장(처음)부터 가장 깊은 곳(끝)까지,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거대한 공간은 이렇게 베르니니라는 천재의 손에서 마침내 완성됐습니다.

베르니니의 기념비를 찾으시나요
성 베드로 광장을 통해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 베르니니의 명성은 이제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마침내 당대 최고의 권력자,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마저 그를 원하게 됩니다. 베르니니가 67세가 되던 1665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직접 베르니니를 궁정에 초대한 이유입니다.

원래 교황청은 베르니니의 출국을 막으려 했습니다. 베르니니는 유럽 최고의 예술가이자 로마를 유럽 예술의 중심지로 만든 주인공. 그런 베르니니가 프랑스에 눌러앉는다면, 로마의 위상은 실추될 게 뻔했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협박에 가까운 강력한 요구로 베르니니는 프랑스에 잠시 머물게 됐습니다. 베르니니가 프랑스에서 남긴 대표적인 작품은 루이 14세의 흉상. 이 조각상은 실제 루이 14세의 모습보다 눈이 좀 더 크고, 이마가 좀 더 높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일부 프랑스인들이 “조각상이 잘못됐다”고 하자 베르니니는 답했습니다. “내가 만든 왕은 그대들의 왕보다 더 오래 사실 것이오.”


프랑스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베르니니는 열정적으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1680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후유증으로 인해 베르니니는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내 팔은 한평생 그렇게나 열심히 일했으니 죽기 전에 짧게나마 쉬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82세였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한 예술가가 대개 그렇듯, 시대가 바뀌고 유행이 변하자 베르니니는 ‘흘러간 촌스러운 예술가’ 취급을 받았습니다. 18세기 유럽 미술의 대세는 신고전주의. 화려하고 감정적인 바로크 미술과 정반대로, 신고전주의는 심플하고 순수하며 냉정한 예술을 추구했습니다. 신고전주의자들은 바로크 미술을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퇴폐적이며 혐오스럽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베르니니는, 새로운 세대가 비판하는 ‘적폐’의 대표주자였습니다.

하지만 바로크 미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르니니가 다시 없을 위대한 천재 예술가라는 사실을요. 1757년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가 그린 ‘현대 로마의 풍경화들이 걸린 화랑’이 그 증거입니다. 신고전주의 유행이 한창일 때 그려진 이 커다란 그림에는 로마를 대표하는 풍경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익숙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왼쪽 아래의 피우미 분수, 기둥이 있는 성 베드로 광장, 그리고 조각상 ‘다비드’와 ‘아폴론과 다프네’.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들이지요. 그는 로마의 모습을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베르니니의 시신은 집 근처 성당에 조용히 묻혔습니다. 1898년 후손이 작은 대리석 명판을 얹어주기 전까지, 그의 무덤 위에는 어떤 장식도 없었습니다. 베르니니가 죽은 유명인의 무덤 장식과 화려한 조각상을 한평생 만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베르니니에게 기념비는 딱히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리석 묘비, 화려한 청동 무덤 장식, 베르니니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 그 어떤 것도 베르니니라는 천재의 기억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대신, 베르니니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로마 시내를 둘러보면 됩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부터 보르게세 미술관까지 펼쳐지는 그 장엄한 건축과 예술품들. 그 자체가 바로 베르니니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기념비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사는 Bernini: His Life and His Rome(Franco Mormando 지음), 디자인 천재(제이크 모리세이 지음, 김난령 옮김), Bernini(Anna Coliva, Andrea Bacchi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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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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