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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최초 여성 CEO 윤여순 "우아하게 이긴다는 건, 나답게 하는 것" [설지연의 독설(讀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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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 인터뷰

퇴임 후 '코치'로 인생 2막 열어
"육아 두려워 말고 일하러 나오라"
"여성 인재, 믿고 써달라"는 당부
책 쓰고 강연하며 다음 세대 응원



'LG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이란 수식어의 주인공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70). 그는 대기업에서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요즘 현역 때 못지않게 바쁜 스케줄을 뛰고 있다. 대기업 리더들을 이끌며 '코칭 전문가'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윤 전 대표는 결혼 뒤 미국으로 건너가 육아와 박사 과정을 병행하다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기업에 몸을 담았다. 대기업에서 여성 리더는커녕 여성 팀장도 드물던 시절, 그는 HR(인적 자원) 분야의 혁신을 주도했고, LG아트센터 대표로서 예술 경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리고 퇴임 이후에도 '코치로서의 삶'이라는 또 다른 '처음'에 도전하고 있다.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있던 그는 이제 고군분투 중인 후배 여성들의 내면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더 나은 리더십과 조직 문화를 위한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 처음이라 언제나 혼자였고, 낯설었으며, 때로는 버거웠던 경험을 공유하며, 여성들에게 일터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나눠주는 것.

인터뷰 중 그는 두 가지 메시지를 또렷하게 내놨다. 여성들을 향해선 "육아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하러 나오라", 그리고 남성들에게는 "여성 인재를 써달라". 그의 추천 책에서도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 여성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다음 세대 여성을 향한 간절한 당부가 담겨 있었다.

▶ 요즘에는 코칭 일을 하고 계신다고요. 은퇴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2014년 LG아트센터 대표에서 퇴임했으니 10년쯤 됐어요. 이런 세상이 올 줄은 정말 몰랐죠. 제가 은퇴할 당시만 해도, 그저 2년 정도는 고문 같은 타이틀을 달고 좀 있다가 끝나겠거니 했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은 그런 형식적인 역할이 아니라, 제 본업이 됐어요. 지금은 비즈니스 코칭, 특히 대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코칭을 하고 있어요. 강의도 많이 하고요. 제2의 인생을 이렇게 선택한 게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지금 굉장히 행복하고요.

제가 예전엔 HR 분야에서 일했는데, 그때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을 정말 많이 했어요. 하지만 항상 이런 고민이 있었죠. '내가 진짜 이들을 성장시켰을까?', '내 역할을 충분히 한 걸까?' 같은 질문이요. 사람을 다루는 일이니까,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러던 중 '코칭 리더십'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됐어요. 그전엔 유명 석학을 초청해서 강의도 듣고, 프로그램도 많이 운영했는데, 뭔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코칭 리더십을 만났을 때, '아, 이거다, 이게 답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은퇴 후에 국제 코칭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죠. 지금은 '코칭경영원'이라는 곳에 파트너 코치로 소속돼 있고요."

▶국제 코칭 자격증이 따로 있군요.

"네, 코칭 자격증을 따려면 보통 2년 정도 걸려요. 수행 시간(practice hour)도 필요하고, 시험도 봐야 하고, 여러 교육도 일정 시간 이상 이수해야 하거든요. 그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즐겁게 했어요. 나이가 들었는데도 일거리가 올까 싶었지만, 그냥 공부 삼아, 좋아하는 거니까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정말 인생은 'We never know'예요. 코칭이 이렇게 기업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성장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수요가 많아지니까 일도 계속 생기고, 덕분에 저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주로 만나는 대기업 임원들은 조직의 리더로서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에요. 성과를 내야 하는 위치니까요. 그런데 성과라는 게 단순히 일만 잘한다고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일을 하는 건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과 씨름하고, 관계를 맺고, 신뢰를 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게 중요한데, 그게 정말 쉽지 않아요. 대기업 임원 정도 되면 일은 다 잘해요. 하지만 직급이 올라가고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단순한 '일 능력'만으로는 한계가 와요. 그래서 코칭 리더십이 더더욱 중요하죠. 무엇보다 저는 이 일이 절박한 사람들에게 진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껴요."

▶ 요즘 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실 때, 그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건 어떤 지점인가요?

"MZ세대가 등장하면서 조직 문화도 많이 달라졌잖아요. 그런데 지금의 리더들, 특히 중년 이상의 임원들은 예전의 '꼰대식 리더십'을 보고 배운 세대예요. '라떼는 말이야' 식의 리더십이 당연했던 시절에 성장했고, 그런 식으로밖에 리더십을 배울 기회가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고, 조직 내에서는 새로운 방식의 소통과 리더십을 요구받아요. 이게 그분들에게는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그래서 이런 변화에 적응하는 문제는 요즘 코칭 주제 중에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저는 오히려 젊은 세대, 그러니까 MZ세대에게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해요. '여러분, 직장에서 꼰대 같아 보이는 상사들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제가 그분들을 가까이서 자주 만나보면, 그분들 속마음은 여러분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수강생들이 다 웃죠. 하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세대 차이 속에서 생기는 오해와 갈등이 많지만,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잘 몰라서 생기는 일들이거든요."



▶ 직접 쓰신 책 <우아하게 이기는 여자>는 많은 커리어우먼에게 큰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제 커리어에서 비롯된 경험 때문이에요. LG에서 오랫동안 HR 임원으로 일했는데, 임원이 된 게 2000년이었어요. 그 시절에는 대기업에서 여성 임원이 없었고, 저도 그냥 잠깐 '꽃'처럼 있다가 나가게 될 줄 알았어요. 저 자신도 '길어야 4년'이라고 생각했죠. 그 이상은 못 버틸 거라고요. 하지만 '이왕 된 거, 여기서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냥 한때의 가십거리처럼 '옛날에 여자 임원 하나 있었지'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뭔가 업적을 남기고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일했죠. 그러다 보니 자르지도 못하더라고요.

그렇게 상무로 10년을 일한 끝에 전무가 됐어요. 남자였다면, 그 정도 실적이면 3년이면 승진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자는 아무도 '밀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남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라인이 있지만, 여자는 관심 밖이거든요. 전무로 승진한 것도 당시 구본무 회장님이 연말 인사 보고를 받으시다가 '윤여순 상무는 일도 잘하고 열심히 하는데, 이제 전무 한번 시켜주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주변에 물어보셨대요. 그 자리에 있던 남성 임원들이 'NO'라고는 못한 거죠. 제가 문제가 있었으면 반대가 나왔겠지만, 일 열심히 하는 건 모두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전무가 됐고, 이후에는 LG아트센터 대표를 맡게 됐죠. 그 역할을 끝으로 정년퇴임을 하게 됐고요.

책은 퇴임 무렵, 저에게 꾸준히 '책을 쓰라'고 권한 후배 때문에 쓰게 됐어요. 거의 5~6년 동안 저를 만날 때마다 책을 써야 한다고 했죠. 저는 처음엔 '내가 뭐 유관순 열사도 아니고, 이렇게 책까지 써야 하나? 괜히 별것도 아닌 사람이 책 쓰는 건 공해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차를 마시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요즘 후배들에게 선배님이 겪은 이야기만 들려줘도 정말 큰 도움이 될 텐데, 왜 그런 걸 공유 안 하세요?' 그래서 제가 또 '요즘 애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잘하는데, 나는 이제 잊힌 사람이고, 고리타분한 옛날얘기 늘어놓는 건 좀 흉해' 그랬더니 그 친구가 '혼자 겸손한 척 빼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니에요'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어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죠."

▶ 책 쓰는 과정은 어땠습니까.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도 처음 몇 달은 구상만 했어요. 큰 틀을 정하고 나니 글은 술술 써졌어요. 집중해서 석 달 동안, 매일 새벽 4시까지 글을 썼죠. 그때 마침 코칭도 시작했는데, 제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대기업의 남성 임원들이었거든요. 여성 임원은 여전히 너무 드물어요. 많은 여성이 리더가 되기 직전 단계에서 막히기도 하고요. 저는 그런 여성들에게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힘을 실어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 코칭 대상은 대부분 남성이라, 여성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그럼 책으로라도 한번 남겨볼까' 하면서 썼어요. 출판사는 소개를 통해 단 한 군데 알아봤는데, 단박에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됐고, 이후엔 '유 퀴즈 온 더 블럭'까지 출연하게 됐죠. 책 쓰라고 꾸준히 말해준 그 후배에게 지금도 말해요. '넌 내 인생의 은인이야'라고요."

▶ <우아하게 이기는 여자>라는 제목이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아하게'라는 표현을 쓰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예전에는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여성이 살아남으려면 '나도 남자만큼 할 수 있다'는 걸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어요. 남성보다 더 열심히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고, 그렇게 해야 살아남는다고 믿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이 나에게 이런 모습을 요구한다고 해서, 정말 내가 여기에 나를 맞춰야 할까?'

저는 그 틀을 좀 넘어서고 싶었어요. '남자처럼'이 아닌, 나답게, 여성으로서의 나다움을 지키면서도 리더로 설 수는 없을까. 물론 쉽지는 않았어요. 품격 있게, 여유 있게 상황을 이끌고 때로는 조율하며 나아가는 법을 익히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좌충우돌하면서, 때로는 상처받고 또 배워가며 성장해 온 거죠.

그래서 지금은 후배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애초에 '남자만큼 잘해야 한다'는 걸 목표로 삼지 말라고요. 그들을 따라잡는 게 인생의 목적이 되어선 안 돼요. 우리는 '여성 아무개'로서, 혹은 '인간 아무개'로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는 걸 믿고, 자기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해요. 긴 호흡으로요. 직장에서 잘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게 커리어의 끝은 아니에요. 요즘 같은 세상엔 새로운 시작도 가능하고, 다른 방식으로 기회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길게 보고 자신만의 방향을 잡으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그게 진짜 '우아하게 이기는' 방식이니까요."



▶ 벌써 4년 전입니다만,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셨던 게 당시 큰 화제가 됐습니다.

"제 언니(배우 윤여정)가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됐을 때였어요. 언니가 인터뷰를 안 하니까, 곳곳에서 저한테까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언니의 뜻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나도 하고 싶지 않고, 언니도 싫어할 거다. 설령 언니가 하라고 해도 나는 안 한다'고요. 그러고 있던 와중에 유퀴즈 출연 요청이 들어왔어요. 처음엔 이것도 언니 일과 관련된 줄 알고 거절했죠. 그러자 주변에서 '말도 안 된다. 꼭 나가야 한다'고 설득하더군요. 제 딸도 '엄마, 유퀴즈는 나가. 나가면 엄마한테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내가 같이 가줄게.' 그러더라고요. 늘 제 동지 같은 존재인 딸의 말에 용기를 냈어요.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방송 이후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제가 '육아를 두려워하지 말라. 잘 키우고 일도 잘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많은 여성에게 울림을 준 것 같아요. 방송 후에 온라인 기사도 많이 실렸고, 댓글도 엄청나게 달렸더라고요. '너무 위로됐다', '용기를 얻었다'는 반응이 많았고, 그걸 보면서 '내가 이 이야기를 더 일찍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때부터 강연 요청이 정말 많아졌고요.

여성 대상 강의는 가능한 한 빠지지 않고 가려고 해요. 강의장에서 한두 명은 꼭 울어요. 그만큼 조직 생활이 여성들에게는 아직도 힘들다는 뜻이겠죠. 가끔은 저도 맥이 빠져요. '언제까지 여성들에게 힘들어도 할 수 있다, 개척해 나가자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이런 이야기를 왜 여성에게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외국계 기업은 좀 달라요. 여성 리더십 강의에도 젊은 남성들이 많이 들어와요. 어떤 남성은 '아내가 출산 후 복직할까 말까 고민 중인데, 저도 함께 고민돼요'라고 진지하게 질문하더라고요. '아내의 경력은 아까운데, 애 키우기도 너무 어렵다'는 거죠. 이 나이에도 제게 꿈이 하나 있다면, 언젠가 남성들만 모인 자리에서 강의해보는 거예요. '여성 인재를 어떻게 키우고, 조직 안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당신들의 리더십이 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 그걸 스스로 고민하고 나한테 질문하는 남성들을 만나 강의해보는 것, 그게 제 마지막 꿈이에요."



▶ 평소 '여성' 관련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두 가지 있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여성들이여, 육아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하러 나오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처럼 교육을 잘 시킨 나라가 전 세계에 많지 않아요. 남녀 구분 없이 대학까지 나온 고학력 여성들이 수두룩하죠. 그런데 제가 수많은 강의를 다니고 현장에서 느낀 건, 그렇게 잘 교육받은 여성 인재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에요. 지금도 대기업에 가보면 여성 직원 비율이 30%도 안 되고, 리더급으로 올라가면 5%도 채 되지 않아요. 제가 일할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여성 리더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라는 오명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참 안타까워요.

국가와 사회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교육시킨 여성 인재들이 결국 사회에 나와서는 제 역할을 못 하고 주저앉는 거예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결국 또 '교육'이 문제예요. 우리나라 교육이 너무 경쟁적이잖아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부모가 모든 인생을 걸고 매달리잖아요. 특히 엄마들이 '내가 이 경쟁사회에서 우리 아이를 잘 키우려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결국, 다시 한번 여성의 희생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안타까운 악순환이에요. 교육열이 온 국민을 이끌어 올린 힘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열정이 가족을 억누르고 있어요.

아이 하나를 위해 온 가족이 줄을 세우고, 엄마가 인생을 거는 이 구조는 언젠가 대가를 치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교육에서 자란 아이들이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저는 회의적이에요. 창의성과 독립심은 경험과 자율성 속에서 자라나는 건데, 엄마가 모든 걸 붙들고 있으면 아이는 오히려 위축돼요. 엄마도 자기 삶을 살아야 해요. 직업이든 일이든,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이에게 가장 큰 가르침은 '우리 엄마도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야'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육아 때문에, 혹은 아이 교육 때문에 사회를 떠났던 여성들이여, 다시 일하러 나오세요. 당신 인생을 사는 것이 곧 아이에게도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일하고 있는 여성들보다, 오히려 집에 있는 여성들에게 더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 '여성들이 육아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하러 나오라'는 메시지였고요. 두 번째는 무엇인가요?

"두 번째는 남성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지금 높은 자리에 있는 많은 남성, 사실은 누나나 여동생, 혹은 어머니가 구로공단 같은 곳에서 일하며 뒷바라지해준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런데 지금 조직 안에서 의사 결정권은 거의 다 남성에게만 있어요. 여성은 여전히 결정권자가 아닙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사회가 정말 발전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여성을 조직 안에서 제대로, 적극적으로 써야 해요.

한국 여성들은 정말 유능해요.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인데, 정작 일터에서는 여성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OECD 국가 중 여성 리더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한국이에요. 이건 굉장히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리더십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싸해지는 걸 느껴요. 남성들이 불편해하죠.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남성들이여, 여성 인재를 써 주세요. 당신들이 개인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 이 사회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일,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일을 해보세요. 그게 진짜 리더십이고, 그것이야말로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산입니다. 한국 여성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스스로 해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성과를 보여줄 겁니다. 그러니 꼭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 지금도 활발히 코칭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으신가요?

"사실 저는 그런 게 없어요. 박사 과정을 시작했을 때도, 기업에 들어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고 제가 임원이 되리라고는 꿈도 꿔본 적 없는 시대였어요. 제 인생은 단 한 번도 계획한 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어요. 그냥 돌아보면, 매 순간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에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길이 열리고, 또 다른 기회가 다가오고... 그런 흐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코칭을 하며 지내고 있는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에요. 이 나이까지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죠. (윤여정 선생님도 그렇고 자매분들이 인생 후반기에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나이 든 사람들이 계속 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변화가 있었기에, 저 같은 사람도 여전히 사회 안에서 쓰임이 있고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거죠."



▶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오셨는데, 일하시면서 특히 도움이 됐던 책이 있을까요?

"제가 한창 일할 때는 아무래도 일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봤어요. 사람, 조직, 리더십, 경영과 관련된 책들, 특히 HR과 리더십에 관한 전문 서적이나, 그때그때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최신 경영 서적들은 당연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도 저는 저만의 색깔을 찾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눈길이 갔던 게 '여성 바이오그래피(전기)'였어요.

그 당시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방장관, 헬렌 토머스 미국 기자 같은 여성 인물들의 전기를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헬렌 토머스는 백악관을 가장 오래 출입한 기자였죠. 집요할 정도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꼭 마지막엔 'Thank you, Mr. President'라고 인사하는 게 트레이드 마크였죠.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라기보다, '나는 나대로 내 길을 이렇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또렷해지더라고요. 그들이 자신의 시대와 상황 속에서 어떤 과제를 뚫고 나갔는지를 보면서, 저도 제 자리에서 용기를 얻곤 했죠.

요즘은 아무래도 코칭과 관련된 전문 서적들을 많이 읽어요. 하지만 이제는 여유가 좀 생기니까, '나 자신을 더 찾고 싶다'는 마음도 커졌어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보고 싶은 책을 따로 메모해두기도 해요. 신문이나 매체를 보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적어놨다가, 시간 나면 직접 서점에 가서 사 오는 걸 좋아해요. 아직도 종이책을 서점에서 고르는 게 제일 좋아요. 그리고 한 번에 몰아서 읽는 편이에요. 요즘 읽는 책들은 특정한 주제가 있다기보단, 그냥 '지금 내가 관심 있는 책', '지금 내 눈에 들어온 책'이에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오히려 지금의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아요."

▶ 추천 책 10권을 부탁드리겠습니다.

1. <안나 카레니나>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소름 끼치도록 섬세한 인간의 심리묘사가 압도적이죠.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인간 그리고 그들이 펼쳐가는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불후의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인생의 고전입니다. 김영하 작가도 인생의 책 5권에 꼽았더군요.

2. <혼불> | 최명희-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양반사회의 기품, 평민과 천민의 고난과 애환을 생생하게 묘사한 대하소설이에요. 우리나라 풍속의 생활사가 더할 수 없이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작품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 예를 들면 빨래하는 것, 염색하는 것, 장례 절차 등 우리의 풍속사를 소름 끼치도록 상세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한국 문학사에 여성작가 최명희만이 혼을 불살라 그려낼 수 있었던 독보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경리 작가의 '토지'보다 덜 읽히는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죠.

3. <진리의 발견> | 마리아 포포바- 30대 젊은 여성이 쓴 800p 벽돌 책인데 완전히 빠져들어 읽은 책입니다. 최근에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 얘기가 많은데(여성이 7명), 그들의 삶과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약한 다양한 인물들을 연결해서 보는 관점이 독특합니다. 천문학 얘기가 많은데 광활한 우주 속에 점 같은 인간들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케플러부터 다윈, 브라우닝, 에밀리 디킨슨, 레이첼 카슨까지.

4.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인간의 역사와 세계사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서양인들의 관점과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 놓은 가설을 뛰어넘는 작품을 별로 보지 못한 느낌이었어요. 유발 하라리는 자기만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독창적으로 바라보고 있어 아주 흥미롭게 빠져들며 읽은 책입니다.

5. <푸른 들판을 걷다>,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어 키건- 암시의 끝판왕이랄까, 주된 사실 묘사보다 주변에 대한 묘사나 함축적인 여백이 더 많은 글 스타일인데 오히려 감정을 더 정확히 짚어주고 훨씬 더 풍부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주제가 주로 '무자비하게 이기적인 남자 vs 헤쳐 나가는 여자'인데도 암시의 아름다움이 수채화처럼 느껴져서 최근에 읽은 소설가 중 가장 유니크 했어요. 모름지기 예술가는 유니크 해야!



6. <광기와 우연의 역사> | 슈테판 츠바이크- 역사, 세계사를 사건 위주로 훑듯이 다룬 책은 많지만, 역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의 인간 심리를 너무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죠.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정치가뿐 아니라 헨델, 괴테, 도스토옙스키 등. 마치 그때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잡히듯이 읽히는 문장력이랄까요.

7.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 최진석- 철학이 현실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고 보는데, 현실에 발을 딛은 대한민국의 철학자로서 정치, 사회, 국가를 얘기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애정과 더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는 '시선의 높이'를 늘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죠. 철학자가 너무 정치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플라톤도 국가론을 기본으로 얘기했었죠.

8. <스쿠르테이프의 편지> | C. S. 루이스- 첫 장에 '톨킨에게'라고 쓰여있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제대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 늘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에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인간의 나약함, 악마성, 유혹 등이 펼쳐져요. 그런데 그것들이 얼마나 쉽게 우리를 찾아올 수 있는지, 그 애매모호한 경계를 얼마나 칼같이 의식할 수 있어야 하는지 깨닫게 되죠. 깨달아도 실천이 어렵고.

9. <뒤에 올 여성들에게> | 마이라 스트로버-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최초의 여성 교수인데 여성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성차별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할아버지도 시대의 제약에 순종하라고만 하고, 여성 교수가 되고 나서도 남성 교수의 연봉과 어마어마하게 차별받은 걸 나중에 알게 되죠. '일하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강력한 부르짖음.

10. <수전 손택의 말> | 수전 손택, 조너선 콧- 미국문화가 압도적이었던 6~70년대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 불리며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에 반기를 두고 자유분방하지만(수필가, 소설가, 희곡 작가, 영화제작자) 깊이 있고 자기만의 컬러로 지성을 발휘한 여성이 인터뷰한 내용이라 더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녀의 <사진에 관하여>는 지금 같은 비주얼 시대에 이미지에 갇히는 인간의 모습을 일찌감치 지적한 것 같아요.

11. <빌 캠벨, 실리콘밸리의 위대한 코치> | 에릭 슈미트, 조너선 로젠버그, 앨런 이글- 현재 저의 직업이 코치인데 제가 닮고 싶은 코치입니다. 스티브 잡스, 제프 베이조스, 에릭 슈미트, 셰릴 샌드버그 등 실리콘 밸리를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리더들이 가장 고민할 때 달려가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영향력 있는 코칭을 한 분이죠. 그들이 비즈니스 고민을 풀어나가며 더 나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준 코치!

▶기억에 남는 책 속 한 문장을 꼽아주신다면요.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첫 문장.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아마도 작가는 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수없이 고치고, 고민했을 거예요. 이 한 문장이 이 책 전체를 함축하고 있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다시 이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힘이 있어요. '역사'라는 건 굴곡지고, 비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도 않죠. 우리는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른 채 상처받고 휘둘리고 망가져요. 하지만 이 문장은 그렇게 억압받고 부서진 사람들 속에서도 살아남은, 굳건하고 강인한 인간의 목소리를 담고 있어요. '그래도 상관없다. 우린 여기서 살아남았고, 꿋꿋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주저 없이 이 문장을 고르고 싶네요."

■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의 추천 책



'설지연의 독설(讀說)'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책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눠보는 연재 코너입니다.



글=설지연/사진=임형택 기자

오늘의 신문 - 2025.07.19(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