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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느렸던 파리역 시계, 30분 늦게 돌아갈 북한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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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북한이 올해 8월 15일 광복절부터 표준 시간을 30분 늦춘다고 발표했다. 사실 표준시는 시계의 발명과 자본주의의 발달, 글로벌화의 3가지 요인이 밀접하게 얽혀 탄생한 것이다.

시계는 근대의 산물로, 등장 초기에는 대표적인 사치품으로 꼽혔다. 1797년 영국에선 모든 시계에 세금이 부과됐다. 사치품인 시계는 철저한 징세의 대상이었다.

당시 영국의 세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조세 감정인의 신고서는 영국인들 가운데 시계가 얼마나 보급돼 있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피블스란 조그만 마을의 조세신고서에는 “읍내에는 시계(clock·괘종시계나 탁상시계)가 15개, 은제회중시계가 5개 있으며 금제회중시계는 없다. 피블스 읍내와 시골, 교구를 통틀어 시계는 105개, 은제 회중시계는 112개, 금제 회중시계는 35개 있다”는 식으로 꼼꼼하게 세금부과를 위한 기록을 남겨두었다.

14~15세기까지만 해도 개인이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기계식 시계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공공부문에서 주로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356년 볼로냐의 시청사에 공공시계를 건립하기 위해 20세 이상 모든 시민에게 18페니의 세금이 부과됐다. 1386년 프랑스 국왕은 리옹시의회가 공공시계 건립을 위해 부담금을 징수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당시 일부 리옹시민들은 세금 부담 탓에 시계 건립 계획에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계가 인간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본격적으로 미친 것은 19세기다. 그리고 그 본고장은 영국이었다. 19세기 후반 세계 전역을 지배했던 ‘대영제국’은 세계각지의 영토 뿐 아니라 각종 주요 표준까지 지배했다. 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영국이 세계 측량단위의 기점역할도 병행했다. 1884년 국제위원회는 런던 근교 그리니치를 지나는 선을 세계경도의 기준점인 ‘0’으로 삼았다. 이 때 부터 각국의 지도 제작자들은 자국의 수도를 세계중심에 놓던 습관을 버리고 경도에 일련번호를 매기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동의해야만 했다. 또 영국을 기점으로 하는 지리적 ‘개념’들도 등장했다. 아시아 대륙은 대영제국과의 거리에 따라 근동(近東·the Near East)과 중동(中東·the Middle East), 극동(極東·tha Far East)으로 구분됐다.

그리고 이 같은 영국중심의 기준은 시간측정에도 적용됐다. 영국 그리니치의 시간이 전 세계 시간을 기록하는 원점이 되고, 지금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GMT)

사실 서양에선 13세기말 ‘시계’라는 기계장치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시계는 ‘대충’ 교회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데 활용됐을 따름이다. 시계를 가리키는 영어에서 시계를 의미하는 ‘clock’이라는 단어부터 종(鐘)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Glocke’, 프랑스어의 ‘cloche’와 연관된 것이다. 교회의 주요 일과시에 종을 치던 습관에서 유래했다.

이후 시계 보급이 확대되면서 시간을 균질적으로 나누게 됐다. 낮이 긴 여름이나, 낮이 짧은 겨울이나 동일한 시간대로 구분되면서 ‘전국’의 시간을 통일하고 그 기준을 잡으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일찍이 프랑스에선 1370년에 샤를5세가 파리 시테섬에 있는 궁전에 설치된 시계를 기준으로 파리의 모든 시계를 맞추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백년전쟁에 관한 『연대기』를 쓴 장 프루아사르는 1380년 무렵 『연대기』를 쓰던 도중에 성무일과를 기준으로 기록하던 시간을 시계에 따른 시간으로 바꿔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정확한 시간은 측정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자연의 주기에 따른 대단히 유동적인 시간기준에 의거해 살아갔다. 19세기 중반까지 마을마다 독자적인 시간개념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과 태양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매일 같은 시간에 산보를 나섰다는 칸트의 유명한 에피소드도 진위가 좀 의심스럽긴 하다.) 19세기 이전에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기에 시계에 분침이 없었지만 1880년대에는 초단위 까지 정확히 맞출 것을 사람들이 요구하게 될 정도로 사회가 급변했다. 경영자와 관리인, 노동자는 점점 더 시계와 호각으로 규율되는 노동일과에 묶여버렸다. 시간엄수가 장려됐고, 늦으면 벌금이나 해고로 벌을 받아야 했다. 시간은 절약해야 하는 대상이 됐고, ‘시간이 돈’인 세상이 됐다. 쥘 베른의 소설『80일간의 세계일주』주인공으로 편집증적으로 시간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된 포그씨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이런 상황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철도의 등장이었다. 1830년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최초의 여객철도가 들어섰고, 이후 철도산업은 이윤이 쏠쏠하게 남는 산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1836~1837년에 영국에서만 총 44개 회사가 총연장 2410km의 사업을 승인받는 ‘철도 붐’이 일었다. 1845~1847년에는 626개 회사가 승인받은 철도건설 총연장이 1만5340km에 달했다. 일부 시행되지 않은 사업도 있었지만 1852년까지 영국에 건설된 철도의 총연장은 1만2000km로 오늘날 영국 철도 총연장의 3분의1에 해당한다.

철도 사업 투자자들은 1990년대 후반의 인터넷처럼 철도를 획기적인 것으로 바라봤고 수익창출 전망이 무한하다고 해석했다. 다른 철도회사들이 똑같은 목적지에 나란히 철도를 건설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철도붐을 타고 기차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거리 개념이 좁혀졌고, 전체 시간망을 통일하는 것도 시급해졌다. 결국 영국에서 철도회사들은 영국 그리니치에서 날마다 별을 보고 관측한 시간인 런던시간을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철길을 따라 늘어선 전신을 이용해서 전국에 시간을 알렸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영국의 사례를 따라갔다. 프랑스에선 열차들이 파리보다 5분 늦은 루앙 시간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파리 기차역 안에 있는 시계는 바깥에 있는 시계보다 5분 늦게 맞춰졌다.

하지만 세계 각지의 혼란은 한동안 계속됐다. 대서양 건너 브라질 상파울루 역에는 시계가 3개 있었는데 하나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도착하는 기차용이었고, 하나는 상파울루주 내에서만 운행하는 열차용, 세 번째는 산토스항에서 오는 기차의 시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영토가 너무 넓었던 미국은 자국만의 시간대를 따로 정해버렸다. 1870년대 미국에는 서로 다른 지방시간대가 300개, 철도시가 80개 있었다. 이에 따라 버펄로역에는 시간이 각각 다른 시계가 3개 있었고, 피츠버그역에는 6개의 다른 시계가 걸렸다.

이런 상황의 해답은 전신망이 제공했다. 국제적 전신망이 확립되면서 각 국가들은 시간 측정에 관한 기준 확립에 합의했다. 마침내 전 세계의 시계가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세계 시간의 기점은 영국 그리니치가 됐다.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시간측정의 기준까지 자연스럽게 장악했던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은 시간관념의 변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시계기술의 발전과 발걸음을 같이했다.

***참고한 책***
앨프리드 크로스비, 『수량화 혁명-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 김병화 옮김, 심산 2005
퍼트리샤 파라,『우리가 미처 몰랐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 김학영 옮김, 21세기북스 2010
카를로 M. 치폴라,『시계와 문명-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2013
케네스 포메란츠·스티븐 토픽,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교역으로 읽는 세계사 산책』, 박광식 옮김, 심산 2003
김덕호 外,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에코리브르 2013
마이클 에이더스,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과학,기술, 그리고 서양우위의 이데올로기』, 김동광 옮김, 산처럼 2011
정수일,『고대문명교류사』, 사계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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