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의 역사읽기) 낙랑 지역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인 인장과 칠기, 봉니(封泥, 공문서를 봉함하기 위하여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붙이는 인장을 눌러 찍은 점토덩어리), 금구(金具 쇠붙이로 만든 손잡이나 문고리) 등에선 王, 韓, 張, 黃, 孟, 高, 孫, 吳, 杜 등의 중국 성씨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이들 유물을 발굴한 일본인 학자들은 이들 성씨를 근거로 분묘의 주인을 낙랑군을 지배한 ‘토착 한인(土着漢人)’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 한나라 시절 서남이(西南夷)의 정체와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蜀郡 등의 복속민 명단에서 楊, 李, 杜, 趙, 屈, 蘭, 養, 宋 같은 중국 성씨를 지닌 이민족이 흔하게 발견되면서 성만 가지고 한족 계열(漢系)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낙랑 유물에서 보이는 중국식 성명을 모두 한나라 계열 사람들로 추정하는 것은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 낙랑의 대표적인 대성(大姓)으로 기자의 후손을 자처했던 한(韓)씨와 왕(王)씨는 고조선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실제 전·후한 교체기에 낙랑 태수를 살해하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한 ‘土人’인 왕조(王調)라는 인물에 대해 『후한서』는 ‘낙랑인’으로 표기하면서 (토착)낙랑군민 출신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히기도 했다.
주목되는 것은 각종 문헌사료와 고고학 유물에서 발굴되는 낙랑지역 인명의 거의 대다수가 성이 한글자로 구성된 단성(單姓)이라는 점이다.
원래 한반도 지역에선 중국과는 다른 형태의 성이 존재했고(후대인 백제 개로왕 9년 일본에 건너갔던 화공(畵工·畵部) 인사라아(因斯羅我)처럼 독자적인 형태의 이름이 당연히 다양하게 존재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단성 형태로 통일되지 않았었다.
한나라 핵심지역에서도 거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성을 갖추게 된 것은 전한 중기 때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성이 없는 백성들이 적지 않았다. 한나라는 군현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사성(賜姓)정책을 실시했고, 이 정책은 성을 한글자로 하는 단성(單姓)중심으로 추진됐다.
이에 따라 춘추시대 이래 상당수 존재했던 두자 이상의 복성(複姓)도 대부분 단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족과 대립했던 이민족들은 꽤 오랫동안 복성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에서 건너온 한계(漢系)주민은 물론 토착출신들에게도 모두 군현정책 강화과정에서 단성이 사성됐다. 중국식 성씨를 지녔다고 모두 한계(漢系)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낙랑에선 전체 이름도 孟遼, 佰章, 佰宣, 佰著, 佰宰, 偉山, 文山, 度山, 小君 같은 (단)성+(단)자 형식의 이름이 많았다. 즉 한글자짜리 성에다 한 글자짜리 이름의 조합이 대다수라는 얘기다.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킨 뒤 전국에 두자로 된 이름을 금하고, 흉노에게도 후한 상을 약속하며 한 글자짜리 이름으로 상서할 것을 요구한 점을 고려하면 중국식 체제를 수용했을 때 당연한 결과라는 게 이성규 서울대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의 경우, 두자로 구성된 복성이 많고 한국과 중국의 경우 단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 차이가 어디서 나왔을까 평소에 궁금했었는데, 중국에서도 원래부터 단성이 자연발생적으로 많았던 것은 아니라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강제된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고대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한족과 예맥계 민족 간의 접촉점 이었던 낙랑에서 성(姓)과 이름을 둘러싼 예상 못한 이벤트가 있었음도 나름 유추할 수 있었다.
‘시게미쓰(重光)’라는 복성으로 된 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일본 성(姓)이 연일 주요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롯데가 한국기업이냐 일본기업이냐의 논란도 분분하다. 성(姓)의 본질, 국적의 본질,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끝)
***참고한 책***
이성규·정인성·오영찬 外, 『낙랑 문화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하지만 이후 중국 한나라 시절 서남이(西南夷)의 정체와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蜀郡 등의 복속민 명단에서 楊, 李, 杜, 趙, 屈, 蘭, 養, 宋 같은 중국 성씨를 지닌 이민족이 흔하게 발견되면서 성만 가지고 한족 계열(漢系)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낙랑 유물에서 보이는 중국식 성명을 모두 한나라 계열 사람들로 추정하는 것은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 낙랑의 대표적인 대성(大姓)으로 기자의 후손을 자처했던 한(韓)씨와 왕(王)씨는 고조선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실제 전·후한 교체기에 낙랑 태수를 살해하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한 ‘土人’인 왕조(王調)라는 인물에 대해 『후한서』는 ‘낙랑인’으로 표기하면서 (토착)낙랑군민 출신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히기도 했다.
주목되는 것은 각종 문헌사료와 고고학 유물에서 발굴되는 낙랑지역 인명의 거의 대다수가 성이 한글자로 구성된 단성(單姓)이라는 점이다.
원래 한반도 지역에선 중국과는 다른 형태의 성이 존재했고(후대인 백제 개로왕 9년 일본에 건너갔던 화공(畵工·畵部) 인사라아(因斯羅我)처럼 독자적인 형태의 이름이 당연히 다양하게 존재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단성 형태로 통일되지 않았었다.
한나라 핵심지역에서도 거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성을 갖추게 된 것은 전한 중기 때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성이 없는 백성들이 적지 않았다. 한나라는 군현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사성(賜姓)정책을 실시했고, 이 정책은 성을 한글자로 하는 단성(單姓)중심으로 추진됐다.
이에 따라 춘추시대 이래 상당수 존재했던 두자 이상의 복성(複姓)도 대부분 단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족과 대립했던 이민족들은 꽤 오랫동안 복성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에서 건너온 한계(漢系)주민은 물론 토착출신들에게도 모두 군현정책 강화과정에서 단성이 사성됐다. 중국식 성씨를 지녔다고 모두 한계(漢系)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낙랑에선 전체 이름도 孟遼, 佰章, 佰宣, 佰著, 佰宰, 偉山, 文山, 度山, 小君 같은 (단)성+(단)자 형식의 이름이 많았다. 즉 한글자짜리 성에다 한 글자짜리 이름의 조합이 대다수라는 얘기다.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킨 뒤 전국에 두자로 된 이름을 금하고, 흉노에게도 후한 상을 약속하며 한 글자짜리 이름으로 상서할 것을 요구한 점을 고려하면 중국식 체제를 수용했을 때 당연한 결과라는 게 이성규 서울대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의 경우, 두자로 구성된 복성이 많고 한국과 중국의 경우 단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 차이가 어디서 나왔을까 평소에 궁금했었는데, 중국에서도 원래부터 단성이 자연발생적으로 많았던 것은 아니라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강제된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고대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한족과 예맥계 민족 간의 접촉점 이었던 낙랑에서 성(姓)과 이름을 둘러싼 예상 못한 이벤트가 있었음도 나름 유추할 수 있었다.
‘시게미쓰(重光)’라는 복성으로 된 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일본 성(姓)이 연일 주요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롯데가 한국기업이냐 일본기업이냐의 논란도 분분하다. 성(姓)의 본질, 국적의 본질,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끝)
***참고한 책***
이성규·정인성·오영찬 外, 『낙랑 문화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김동욱의 역사읽기) 낙랑 지역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인 인장과 칠기, 봉니(封泥, 공문서를 봉함하기 위하여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붙이는 인장을 눌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