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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통진당원이 이석기와 통진당을 제보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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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훈 지식사회부 기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종반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현재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 청구 사건의 선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알고 계세요? 이 사건의 시작은 정치니 사상이니 하는 거대담론보다 감정 문제와 연관된 면이 강했다는 사실을요.

알다시피 이번 사건의 제보자는 한때 통합진보당의 당원이었던 이성윤 씨입니다. 이씨는 대학 시절부터 통일운동(민족주의 계열 사회운동)에 몸담았고 한때 당에서 지역위원장까지 지냈던 ‘성골 운동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정치적 동지들을 ‘배신’하고 국정원에 제보해 통진당이 창당 이래 최고의 위기를 맞게 한 거죠. 그런데 이씨가 제보를 결심하게 된 과정을 보면 한 편의 휴먼 스토리를 보는 느낌이 듭니다.

이씨가 이석기 의원 1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말한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오랜 운동권 조직 생활(검찰은 RO라고 지칭했지요)로 조금씩 지쳐가고 있던 이씨는 몇번의 크고 작은 사건을 거치며 점점 조직에서 정을 떼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씨는 2008년께 술에 만취해 택시기사를 폭행했다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집행유예가 나와 감옥살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씨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는군요.

그런데 당시 몸담고 있던 운동권 조직이 자신을 위로해주기는 커녕 매몰차게 다그쳐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이씨는 재판 증언에서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줬으면 되는 건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조직은 오히려 사건에 개입해 문제를 더 키웠다고 합니다.

이씨가 피해자와 합의하고 약식명령으로 벌금형을 받았는데 조직 윗선이 “당 위원장이고 총선 출마자인데 이런 경력이 있으면 안된다”며 정식재판을 청구하도록 했다는군요. 결과는 집행유예 2년. 괜히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가 졸지에 벌금형을 징역형으로 높이고 말았네요. 이씨는 “변호사비만 몇백만원 날렸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더 결정적인 일은 이듬해 일어납니다. 2009년 조직 윗선은 이씨에게 “무상급식 문제와 관련해 한나라당(옛 새누리당) 당사에서 점거농성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당시 이씨는 집행유예 기간이었습니다. 점거농성을 하다가 잡히면 구속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병인 당뇨가 악화돼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씨가 이러저러한 사정을 얘기하면서 “꼭 내가 해야 하느냐”고 묻자 윗선은 “꼭 당신이 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이씨에게 조직의 지시는 거부할 수 없는 ‘도그마’였습니다. 다음은 이씨의 말입니다.

“수원 장안공원에서 만나 점거농성 지시를 받았다. 당시 많이 당황했다. 공원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길이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잡히면 무조건 구속인데. 우리 아이들은 어쩌고 늙으신 어머니는 어쩌라고 그러는지. 딸에게 ‘아빠가 이런 상황이다’라고 말 못해서 참 답답했다. 집사람한테도 ‘나한테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밖에 못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씨는 점거농성을 하기로 한 당일에,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많이 힘들어하면서” 약속 장소인 사당역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에 40분 정도 늦게 조직원이 나타나더니 “계획이 취소됐다”고 했다네요. 이씨는 한편으로는 구속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했습니다. 아이들과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조직이 자신의 충성도를 시험했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고 합니다. 이 대목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윗선 사람이 ‘조직원의 충성도나 능력이 비슷한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일이 생각나면서 조직이 나의 충성도와 능력을 보기 위해 일부러 점거농성 지시를 해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 때문에 며칠동안 많이 괴로웠다. 당시까지는 조직의 결정은 무조건 옳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에는 사람들이 달라보였다. 사람을 그렇게 시험에 들게 하는 게 맞는건지….”

2010년 용인 자연휴양림에서 열린 조직 수련회에서 이씨는 또 한 번 조직에 대해 실망을 합니다. 당시 조직은 연총화의 일환으로 당의 사업계획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조직은 이씨에게 지역 청년회장의 포섭을 지시합니다. 청년회장은 당연히 조직원이어야 하는데 아니어서 문제라고, 가입시키고 지휘하라고 이씨에게 말합니다.

이씨는 이 사례를 언급하며 “이 일도 내가 제보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 일화가 이씨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런데 앞뒤 맥락과 함께 추측컨대 이씨는 모두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조직의 강압적인 면에 반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건들로 조직에 대한 회의가 커져가던 차에 연평도 포격 사건과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조직은 “북한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씨는 여기서 마음을 완전히 돌립니다. 이씨는 “이 일로 조직과 동지에 대해 실망을 했다. 결정적인 계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제보를 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된 건 맞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상처를 받아 마음이 돌아서 조직에서 이탈하고 싶어하던 차에 연평도와 천안함 사건으로 명분도 생긴 거죠.

이씨는 이 의원 등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된 피의자에 대해 “풀려나면 건강한 생활인으로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통진당이 그동안 수차례의 성명을 통해 이씨를 비난한 것을 보면 섬뜩할 정도니 실제로 이웃으로 오순도순 살기는 틀린 것 같아요. (끝)

오늘의 신문 - 2024.04.20(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