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뒷 얘기

관이 끌고 민은 따라오라는 금융위의 선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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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 증권부 기자)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명예 교수가 얼마 전 폐막한 한경미디어그룹 주최 금융 컨퍼런스에서 ‘사무라이론(論)’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폴 볼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인플레 정책만으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겠나”고 질문하자 하마다 교수는 “구조적인 개혁이 수반돼야 하지만 그러자면 사무라이(공무원)들이 칼과 갑옷을 벗어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엔화를 무더기로 푸는 통화·재정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겁니다.

25일 금융위원회가 해명 자료 하나를 냈습니다. 이날 한국경제신문 A34면에 게재된 취재수첩 ‘봉숭아학당 금융 TF’에 대한 반박문입니다. 기자는 지난달 24일 열린 ‘제1차 금융서비스업 발전 민관 합동 TF회의’가 민관합동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장 관계자 단 한 명도 없이 진행됐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1차 회의는 향후 TF 운영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킥-오프’ 회의였고, 향후 논의 과제에 따라 금융업권 관계자와 전문가들을 사안별로 탄력적으로 참여시킬 예정”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난 12일, 5개 금융업권 협회(은행, 생·손보, 금투, 여전)를 불러 규제 개선 과제를 ‘발굴’했다”고 썼습니다.

앞으로의 각오도 덧붙였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금융 규제를 2008년 이후 5년만에 전면적으로 점검할 계획이며, 이를 위해 금융 현장의 목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수렴해 나갈 것”이라고 말이죠.

금융위의 전향적인 자세는 분명 환영할 일입니다만, 이 해명 자료를 보면서 저는 하마다 교수의 ‘사무라이론’이 떠올랐습니다. 금융위가 사용한 단어들 몇 개에는 거북스러움마저 느꼈습니다.

예컨대 ‘킥 오프’ 회의라는 표현이 의아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축구 용어에서 따온 말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축구에서 시합이 시작될 때나 어느 한 팀이 득점을 하여 시합을 다시 시작할 때 공을 중앙선의 가운데에 놓고 차는 것’을 뜻합니다.

‘킥 오프 미팅’이라는 것은 앞으로 계속될 장기 과제에 앞서 전체적인 틀을 잡기 위해 마련한 가장 중요한 회의입니다. 축구에서도 그렇듯이 킥 오프’에 참여하는 건 당연히 주전 선수들의 몫입니다. 쉽게 말해 금융위가 주관한 지난달의 1차 회의는 주전 선수들이 모여 앞으로의 경기 룰과 목표를 세우는 자리였는데 시장의 민간 전문가들은 주전이 아니었기에 참석시키지 않았던 셈입니다.

‘사안별로 탄력적으로 참여시킨다’는 표현에선 선민 의식마저 느껴졌습니다. 총론은 관료들이 만들어 놓을 테니 ‘민(民)’은 필요할 때 부르면 들어와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이렇다면 ‘민관 합동’이라는 말 앞에 ‘관(官) 주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훨씬 어울리지 않았을까요?

금융위 관료들의 사고 방식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1차 회의 때 관료와 정부 출연 연구소 관계자 외에 유일하게 비(非) 정부 인사로 참여한 위원이 있었는데 강현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이었습니다. 이 분이 금융 발전 TF에 들어가 있는 것이 의외이긴 합니다만,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대한변협 국제교류위원회 소속 미국, 영국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몇몇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대한변협이 작년 말, 대통령에게 ‘한국 금융의 국제화를 통한 선진화’라는 제목의 제안서를 낸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중국이 상하이를 금융특구로 지정해 육성하는 마당에 한국도 더 이상 금융 선진화 과제를 미뤄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진정한 의미의 민관합동 회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금융위를 거치지 않고 청와대의 ‘신문고’를 울린 셈이죠. 괘씸한 생각이 들었겠지만 금융위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대한변협 부회장을 1차 금융 TF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업무 보고만 하다가 70여 분의 주어진 회의 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강현 부회장은 “이런 회의가 무슨 의미가 있나”며 항의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강 부회장은 2차 회의엔 부름조차 못 받았습니다. ‘킥 오프’에 참여했던 주전 선수를 이렇다 할 통보도 없이 빼버린 겁니다. 고분고분한 ‘민간인’만 부르겠다는 의도라고 해석하면 무리일까요?

대한변협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해서였다고 추론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한변협이 청와대에 내놓은 1차 제안서는 대통령 비서실에서 심도있게 검토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할 정도로 ‘피드백’이 있었다고 합니다. 위철환 대한변호사협회장이 대통령 주최 금융인 오찬(작년 12월20일)에 유일한 비금융인으로 참여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하마다 교수의 말처럼 공무원이 규제의 칼을 스스로 손에서 놓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금융위도 존립 근거가 금융 산업의 안정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니 관 주도로 TF를 이끈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한국 금융산업의 현주소를 들여다 보면 이럴 때가 아니라는 시장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폴 볼커 전 의장이 작년에 만든 ‘볼커 얼라이언스’가 한국에도 생기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바마 케어 등 약속만 해놓고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일들을 없애자는 취지에서 볼커 전 의장이 민관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만든 단체입니다. 우리도 금융위 주도가 아니라 민간 영역에서 존경 받는 원로를 중심으로 각계의 총의를 모아 금융 산업 발전을 기본에서부터 점검해 보면 어떨까요. (끝)
(박동휘 증권부 기자)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명예 교수가 얼마 전 폐막한 한경미디어그룹 주최 금융 컨퍼런스에서 ‘사무라이론(論)’을 얘기한 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