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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금리 비싸도 문제, 싸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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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우 금융부 기자

“한국은행이 올해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인하하는 동안 신용융자 금리를 전혀 변동시키지 않은 증권사들이 있다고 한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지난 8월 27일 증권사 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꺼낸 말이다. 그는 “신용융자에 대해 개인투자자들이 불투명성과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이후 증권사마다 신용융자 금리를 0.5~1%포인트 인하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서민 부담 경감’을 명분으로 정부가 대출금리에 개입하는 일이 다시 잦아졌다. 하반기 들어 생명보험사들은 약관대출 금리를 0.3~0.6%포인트 내리고 있다. 이 또한 “소비자 눈높이에 맞추라”는 금융감독원의 채근 때문이다. 내년 하반기에는 법정 최고금리가 연 24%에서 20%로 내려간다. “지금 같은 저금리에 최고금리 연 24%는 시대착오적”(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이라는 이유에서다.
"올려! 내려!" 선 넘은 금리 개입
여기까지는 백 번 양보해서 ‘관치의 K금융’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포퓰리즘 요소가 다분하고 방식도 세련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소비자가 부담하는 이자는 아껴줬으니.

그런데 은행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기이하다. 금융당국의 지도편달 아래 은행들이 신용대출 금리를 올리고 있다. 카드 사용, 공과금 자동이체 등의 우대금리는 폐지되고 급여이체 우대금리는 반토막으로 줄어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소비자가 대출금리를 연 0.2~0.3%포인트 이상 더 물게 됐다. 대출 한도는 신용도 좋은 고소득자를 중심으로 축소되고 있다. 전문직 대출 상품의 경우 5000만~2억원씩 한도가 줄었다. 정부는 가계부채 위험 관리를 이유로 내세우지만 실상은 부동산 규제다. 주택담보대출에 신용대출까지 받아 ‘영끌 대출’(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집을 사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다. 불과 석 달 전 신용융자 금리를 앞장서서 낮춘 금융위원회다. 증권사에서 빚 내서 주식 사는 것은 은행 대출로 집 사는 것보다 덜 위험한가.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엔 이런 일도 있었다. 얼마 전 당국에 불려가 “저금리 대출이 너무 많다”는 질책을 받았다. “중금리 대출 활성화라는 인터넷은행 목적에 맞지 않게 고신용자 대출에 집중한다”는 정의당 의원의 국정감사 지적이 발단이었다. 카카오뱅크가 올 1~9월 내준 중금리 대출(1조220억원)은 2018년 1금융권 전체 중금리 대출 공급액(8920억원)보다 많았다. 은행권의 대출금리 인하 경쟁에 불을 붙였던 ‘메기 효과’도 잊혀진 모양이다. 대출금리가 너무 비싸도 문제가 되고, 너무 싸도 문제다.
이상한 규제와 우회로가 반복된다
이달 말부터 은행 신용대출에도 ‘더 센 규제’가 도입된다. 신용대출을 1억원 넘게 받은 사람이 1년 안에 규제지역 집을 사면 대출을 회수하는 조치가 시행된다. 무주택자인지 다주택자인지 사정을 따지지 않는다. 연소득이 8000만원을 넘으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40%’ 규제도 적용된다. 그동안 대기업 직원과 전문직 종사자들은 은행 대출에서 남들보다 낮은 금리와 높은 한도를 누렸다. 억대 연봉자가 아닌 나로서는 가끔 부럽고 샘나긴 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몰아치는 규제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신용대출은 말 그대로 개인의 신용도에 따라 한도와 금리를 정하는 대출이다. 빌린 돈에는 꼬리표가 없고, 어디에 쓸지는 개인의 자유다. 부동산을 사든 명품을 사든 기부를 하든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할 몫이다. 정부가 금리 조건과 사용처까지 일일이 끼어들면 사유재산권 침해다. 금융권에서는 “가장 피해 보는 사람은 성공한 흙수저”라는 말이 나온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업을 구했고, 그 대가로 넉넉한 자금을 자력으로 융통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사람들이 최근 규제의 집중 타깃이라는 점에서다.

강화된 규제가 발표되자 사흘 만에 은행 신용대출이 1조원 이상 불어났다. 막차를 타려는 수요가 몰려서다. 본인 명의로 한도가 부족하면 부모·형제 대출까지 동원하는 ‘가족 영끌’이 뜬다고 한다. 조만간 더 이상한 규제가 추가되고, 더 이상한 우회로가 생겨날 것이다.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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