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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영화

입시·취업·노후…'경쟁 공화국' 한국사회 29초에 담아

“잘… 안됐니?”

아버지는 멍하니 노트북을 바라보는 아들에게 조심스레 말한다.

“네, 아버지 고생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토닥여준다. 아들은 계속되는 취업 실패에 환경미화원 채용시험에 도전한다. 체력 평가를 위한 100m 달리기 출발선에 선 아들. 그런데 옆 레인의 경쟁자를 흘깃 보자마자 그의 발은 굳어버린다. 옆에는 다름아닌 아버지가 서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버지도 아들이 경쟁자임을 알고 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 아들을 남겨두고 재빨리 출발한다. 이기기 위해서다.(김재광 감독, ‘나 do’)

입시와 취업, 노후 생활까지 일생을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는 한국 사회다. ‘제2회 29초 영화제’에는 일생에 걸쳐 계속되는 경쟁을 담은 작품들과 스마트기기가 지배하는 우리 생활, 정치적 이슈 등과 관련된 작품들이 다양하게 출품됐다.

정지훈 감독의 ‘판타지는 없다’는 ‘입시 지옥’의 현실을 다룬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세 명의 여고생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공부하고 있지만 집중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다. 한 학생은 노트에 그림을 그리며 잠시나마 다른 꿈을 꾸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를 본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학생과 눈을 맞춘다. 모두가 훈훈한 분위기를 상상하는 순간, ‘판타지’ 없는 교실에는 선생님의 매질 소리가 울려퍼진다.

경쟁은 죽음의 순간까지 계속된다. 신재영 감독의 ‘자살도 경쟁이다’의 두 주인공은 유서를 남긴 채 동시에 빌딩 옥상에서 투신한다. 모든 걸 놓겠다는 선택을 하고 뛰어내렸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몸이 땅바닥에 닿기 전까지 둘은 서로 엉겨붙어 치고받는다. “내가 먼저 떨어질 거야”라고 고집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경쟁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블랙코미디다.

‘스마트기기’도 한 주제로 주어진 이번 영화제에서는 ‘스마트한 생활’의 명과 암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손민규 감독의 ‘추억을 담다’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을 보여준다. 딸에게 스마트폰은 기계가 아닌 아버지가 사는 세상이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그 안에 담긴 추억을 꺼내보는 것이다.

또 다른 가족이 있다. 요즘 세상이 험하다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딸은 전과자가 가까이 오면 경보음이 울리는 애플리케이션을 소개한다. 그런데 퇴근한 아빠를 반기며 딸이 달려가 안기는 순간, 집안엔 ‘삐~’ 하는 경보음이 울린다. 이슬이 감독의 ‘식자우환(識者憂患)’이다.

최근의 정치적 이슈와 관련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김대일 감독의 ‘국밥노름’은 정치권의 경쟁적 포퓰리즘을 비판한다.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두운 공간의 탁자에서 두 남자가 포커를 하고 있다. ‘반값 등록금’ ‘최저임금 두 배 인상’ 등 서로의 패를 하나씩 경쟁적으로 꺼낸 끝에 한쪽이 승리를 거두는데, 그의 코는 피노키오처럼 길어져 있다. 김 감독은 시놉시스에서 “‘국밥’은 정치인들이 서민 흉내를 낼 때 즐겨 찾는 음식인 동시에 ‘말아먹는다’는 표현의 상징적인 단어”라며 “표를 위한 공약이 경제를 말아먹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