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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한발 딛고 오르던 ‘사다리’는 와르르…개천의 용 실어나를 '모빌리티'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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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6주년] 2030 희망 모빌리티
사다리를 다시 세우자

(1) 빠르게 무너지는 계층 이동 사다리

부모가 육체노동자면
자녀도 그렇게 될 확률
OECD 평균보다 높아

서울 동작구에 사는 이모씨(29)는 요즘 매일 오전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4시간씩 일하며 월 40만~50만원 정도 번다. 오후에는 학원에서 부사관 시험을 준비하며 지게차 운전 등 가산점이 있는 자격증을 공부한다. 중소기업 관리직으로 평생 일해온 아버지는 올해 7월 권고사직을 당하고 실업급여를 받고 있다. 이씨는 “‘사다리 오르기’라는 말만 들어도 큰 벽을 느낀다”며 “부모 세대는 그래도 뭔가를 쌓아가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겨우 연명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실에서 나타난 사다리 붕괴
청년들의 사회 진출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대학 및 대기업 관계자들의 시각도 이씨와 다르지 않다. 이찬 서울대 경력개발센터장(산업인력개발학 교수)은 “고입 시험이 있던 1970년대, 대입이 중요하던 1980년대 등을 거쳐 이제는 취업이 계층을 판가름하는 준거가 되며 준비에 걸리는 시간과 노력이 늘어났다”며 “그만큼 부모에게 경제적, 정신적으로 받는 지원이 중요해졌다”고 분석했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간부도 “대학 도서관에서 토익책만 열심히 파는 청년과 몇 개월이라도 어학연수를 다녀온 청년을 비교하면 어느 기업이든 후자를 선호할 것”이라며 “성장 환경을 토대로 좋은 경험을 쌓은 지원자가 갖가지 입사 시험에서도 강점을 지니게 마련”이라고 전했다.

실증적으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2015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부모가 관리·전문직에서 일했을 때 자녀도 관련 직종에서 일할 확률은 42.9%에 달했다. 평균(19.8%)의 두 배 이상이다. 단순노무직에서는 해당 비율이 9.4%로 평균(1.9%)의 다섯 배에 달했다.

한국의 계층 이동 가능성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서도 낮다.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가 육체노동자일 때 자녀도 육체노동자일 확률은 40.0%로, OECD 평균(36.5%)보다 높았다. 소득 하위 10%에 속하는 가구의 자녀가 몇 세대를 거쳐야 중산층에 올라설 수 있는지 추정한 결과도 한국은 5세대로, OECD 평균(4.5세대)보다 높았다.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주호 KDI국제대학원 교수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직업 등 가정 배경이 성적에 미치는 영향 계수는 42.75점으로, OECD 평균인 29.66점보다 월등히 높았다. 미국(25.98점), 영국(34.92점), 일본(38.70점)보다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계층 상승 공식 안 통해
전문가들은 1970년대부터 시작돼 1980년대 정점을 찍은 ‘대학교육→좋은 일자리’로의 계층 이동 공식이 2000년대 들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 주목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의 계층 이동 가능성은 1980년대를 정점으로 뒤집어진 U자(∩)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며 “높아진 교육수준이 좋은 일자리 획득으로 이어지던 경제 및 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학 진학률은 대폭 높아졌지만 거기에 걸맞은 양질의 일자리는 그만큼 창출되지 않고 있어서다.

이미 기존 계층 이동 방식을 통해 중·상류층에 진입한 이들이 기득권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서울대 학생이나 공기업 직원들이 입학, 취업 이후 특별히 이룬 게 없어도 본인의 위치를 무리 없이 유지하고 있다”며 “계층 이동 수단이던 시험 및 공채 제도가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도 문제로 지적된다. 서용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사회 전반의 고령화로 청년세대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며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는 신산업이 기득권인 기성세대의 이해관계에 맞춰 가로막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더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경태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 경제 사정을 무시한 무리한 정책 추진으로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며 “교육 평준화와 자율형사립고 폐지 등 획일적 균등 추구로 다양한 기회 창출이 막히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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