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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주년 맞은 10.4 공동선언과 문 대통령의 '세가지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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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 정치부 기자) 2007년 10월4일은 짧았던 ‘한반도 해빙’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노란 선이 그어진 판문점의 ‘임시’ 군사 분계선을 지나 육로로 평양에 들어갔다. 역대 두 번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일장춘몽’과도 같았다. 그 해 11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영변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2009년 4월 북한이 핵실험을 또 다시 강행하기까지는 불과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2차 남북정상회담의 연출자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문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 『운명』에서 이 때의 일을 자세히 기록해놨다. 대통령 부재 중의 내치(內治)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던 터라 ‘문 실장’은 청와대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 간의 만남과 공동선언 도출을 위한 협상을 세밀하게 조율했다.

문 대통령은 이 때의 일을 회고하며, 한 가지 잘한 일과 세 가지 후회되는 일을 언급했다. 잘한 일로 꼽은 건 ‘노란색 군사분계선’을 넘는 ‘이벤트’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겉치레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문 실장’은 정권 마지막 해에 극적으로 성사된 평양 정상회담을 한반도 평화의 초석으로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여론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선 생방송 화면에 잡힌 대통령의 모습에 무언가 극적인 요소를 담아야 했다. 그때 청와대에서 의전비서관실 행정관이었던 오승록 현 노원구청장이 낸 아이디어가 판문점 도로에 노란색 군사분계선을 긋는 것이었다.

지난 9월18~20일 평양에서 이뤄진 3차 남북정상회담은 11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극적이다. 2박3일의 방북 기간 내내 TV 화면에 잡힌 각종 행사들은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11년 전의 경험을 몇 배 ‘업그레이드’한 셈이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세 가지 후회되는 일’은 모두 ‘연속성’이라는 키워드와 연관돼 있다. 문 대통령은 ‘10·4 공동선언’에 대한 국회 비준을 받고자 했다. 그래야 정권이 바뀌더라도 남북 간에 조성된 신뢰가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장애물은 국회가 아니라 정작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운명』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당시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회 비준안을 만드는데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정례화하는 데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러기 위해선 김정일의 서울 답방이 필수였다. 하지만 북한은 김정일의 서울행에 난색을 표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정일은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김정일은 10·4 공동선언을 발표한 지 4년 여 만인 2011년 12월에 사망했다. 문 대통령은 내부에선 국회 비준을 받고,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성사시킨 뒤에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계획을 심중에 품었다. 그러나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강행,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선언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11년 전의 상황은 지금과 꽤 비슷하다. 그때도 북한은 영변핵시설 폐기를 제재 해제의 대가로 내놨고, 종전선언에 대한 얘기가 핵심 화두가 됐다. 문 대통령으로선 ‘세 가지 후회되는 일’ 중 적어도 남북정상회담 정례화라는 숙원은 이룬 듯 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내 서울 답방을 약속했으니 말이다. 나머지 두 개의 소원도 예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 가능성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인 ‘10·4 평양공동선언’이 올해로 11주년을 맞는다. 남북은 다음달 4~6일 평양에서 기념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흐름이 거세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해보다 뜻깊은 행사가 될 전망이다. 과거를 되살피는 것은 단지 기념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모자랐던 점에 대해선 메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잘된 부분은 더욱 계승해야한다. 문 대통령의 중재외교가 11년 전의 ‘도돌이표’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끝)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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