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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접경도시를 가다)③안중근 의사는 두 번의 단지(斷指)를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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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 정치부 기자) 북방 접경도시 답사를 준비하면서 새삼 깨달은 사실(史實)이 있다. 중·러·북한 3국이 국경을 맞댄 간도와 연해주 일대 곳곳에 항일 독립투쟁의 역사가 오롯이 남아 있었다. 선양, 하얼빈 같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단둥, 연길, 훈춘,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등엔 아직까지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밝혀내지 못한 비극의 순간들이 봉인돼 있다.

훈춘에서 만난 양 선생은 잊혀져가는 훈춘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866년에 조부가 조선의 국경을 넘어 회령봉 일대로 가족을 이끌고 넘어오면서 그들의 타향살이가 시작됐다. 부친은 12명의 자식을 가졌지만 돌림병으로 아홉을 잃었다. 양 선생은 “그 기막힌 심정을 나이 80가까워 헤아려보니 가슴이 저민다”고 했다. 가족에겐 불행이지만 그래도 막내인 양 선생은 부모의 극진한 돌봄 덕분에 조선족 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일할 수 있었다.

양 선생은 향토사학자이기도 하다. 여러 권의 책을 냈는데 최근엔 훈춘 역사를 집대성한 책을 출판했다. 그와 함께 3국 접경지대인 방천 일대를 돌아보며 훈춘의 먼 옛날 얘기까지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훈춘을 안중근의 마을로 소개했다. 안중근 의사가 애국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신념을 전환하던 순간에 머물던 마을이 훈춘이라는 얘기다.

역사 교사인 노성태씨가 지은『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등 독립운동의 현장을 소개한 책들을 읽어보면 안중근 의사(이하 안중근)는 본디 무장투쟁론자가 아니었다. 1905년 더 큰 세상을 구경하고자 상하이로 간 안중근은 그곳에서 안면이 있는 프랑스인 곽원량(르 각) 신부를 만나 애국계몽에 대한 신념을 얻는다. 1906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가재를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전념한다.

안중근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07년 아버지의 친구인 김진사를 만나고 난 후라고 한다. 김진사는 긴급한 시국에 촌구석에서 교육 사업에 전념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라고 설파하면서 100만 조선인이 있는 큰 세상, 즉 연대주와 간도 지역으로 나아가 현실적인 투쟁을 해야한다고 설득했다. 그해 조선은 을사늑약 이후 헤이그 특사 사건, 군대해산, 고종 퇴위 등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이 때부터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까지 안중근은 무장투쟁론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안중근이 두만강을 건너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북간도 권하촌, 지금의 훈춘시 경신진이다. 양 선생의 조부처럼 이미 수많은 한반도인(人)들이 훈춘을 터전으로 삼고 삶을 일구고 있었다. 양선생은 “훈춘에서도 안중근은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무장투쟁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안중근이 1909년 2월7일 러시아 크라스키노 인근 연추하라는 하천 인근의 군영 막사에서 ‘단지동맹’을 맺기 전에 훈춘에서도 ‘7인 단지동맹’의 결의를 다졌다는 점이다. 정확한 시기를 물어보진 못했지만 양 선생은 “훈춘에서 안중근 외 7인이 단지를 통해 결의를 밝혔다는 기록을 현지 사료에서 찾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양손 새끼손가락을 자르며 항일 의지를 불태운 것이다.

아쉽게도 훈춘엔 단지동맹비 같은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크라스키노에 있던 12인 단지동맹비도 원래 자리에서 옮겨졌다. 지금은 유니베라 연해주법인이 운영하는 크라스키노 농장 입구로 옮겨졌다. 현지에서 만난 장민석 법인장은 “그동안 비석이 방치돼 있던 터라 훼손 수준이 심각했다”며 “안전한 보존을 위해 부득이 위치를 옮겼다”고 말했다. 크라스키노 마을 초입에 조성된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는 국내 조각가의 설치미술과 함께 번듯한 모습으로 단장돼 있다. 언젠가 양선생이 밝혀 낸 사실이 한국 사학계에서도 인정받을 날이 오기를 바란다. (끝) /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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