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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과
창업

기자가 공채 이력서 직접 써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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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나 캠퍼스 잡앤조이 기자) 채용 시즌, 한 명의 취준생이 지원하는 기업 숫자는 어림잡아 10개가 훌쩍 넘는다. 주요 기업의 채용이 한꺼번에 몰리는 상하반기 공채 시즌에는 특히 더 정신이 없다. 글쓰기에 몰두한 소설가처럼 취준생 역시 노트북 앞에서 자소서를 쓰고 또 쓰며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자소서를 쓰는 시간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20여 년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학창시절을 어떻게 보냈고, 자신의 성격은 어떠하며, 구체적인 미래 계획까지 그동안 생각지 않았던 자아성찰을 비로소 취업을 준비하며 하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일부 취준생 중에는 입사 지원서 작성에 불편함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자아성찰이 아닌 ‘신상 털기’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직접 이력서를 작성해봤다.

기업의 입사 지원은 대개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하나는 자체 채용 시스템에 접속해 내용을 기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사 이력서 양식을 다운받아 작성한 뒤 메일로 제출하는 방법이다. 주요 대기업의 대부분은 자체 채용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중견·중소기업의 경우 이력서를 다운 받은 뒤 작성해 제출하는 방식을 쓴다.

S기업은 다양한 의류 브랜드를 갖고 있는 중견 패션 기업으로 현재 신입사원 채용 중에 있다.
S기업의 채용 사이트에 접속했다. 자체 시스템 접속을 위해서는 이름, 휴대전화, 이메일을 입력 후 비밀번호를 설정해야 한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에도 동의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S기업은 개인정보 외에 ‘민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동의까지 받고 있었다. 입사 후 근무 부서, 업무 배치 등을 목적으로 일부 민감정보를 수집한다는 내용이다. 민감 정보 수집을 동의하지 않는 경우 입사지원서에 해당 정보를 입력하지 않으면 된다고 안내되어 있다.

회사에서 말하는 민감정보는 장애사항과 종교 부분이다. 해당 기업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입사 시 종교는 평가 요소가 아니지만 기업 문화가 기독교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어 이를 감안해 지원해줄 것을 공지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블라인드 채용의 도입으로 많은 기업이 이력서에서 사진 항목을 삭제했다는데, 여전히 사진 첨부는 필수 항목으로 남아있었다. 생년월일과 주소, 휴대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 등도 필수 입력 부분이다.

다음 항목으로 자연스레 손을 옮겼다가 멈칫했다. ‘가족사항’이라는 구시대적 항목이 버젓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원자와의 관계, 가족의 이름을 비롯해 직업, 직장명 등을 구체적으로 기입해야 했다.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 회사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의 직장명을 알고 싶어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가족관계는 부(아버지)부터 조모, 조부, 숙부, 숙모, 장인, 장모까지 다양했다. 어느 선까지 정리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버지와 어머니 정도만 기입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의 직업과 직장명을 쓰고 있자니 문득 언젠가 썼던 ‘결혼정보회사’ 가입 신청서가 떠올랐다. 부동산 내역부터 미래 자녀 계획까지 기입하며 들었던 그 유쾌하지 않았던 기분이 오랜만에 느껴졌다.

찝찝한 기분으로 다음 문항을 작성하려다가 다시 또 한숨이 나왔다. ‘기타사항’ 항목에는 종교와 취미, 특기 등을 기입하고 신장과 체중까지 입력해야 했다. 미인대회 가입신청서가 아닌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며 나의 키와 몸무게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회사에서 비만지수라도 체크해주려는 심산인지, 그 의중은 알 수 없으나 이 역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S기업 관계자는 “해당 문항(가족관계, 신장, 체중, 종교)은 선택 기재사항으로 희망자에 한해서만 기재하면 된다”라며 “향후에는 삭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른 몇 개 기업의 입사지원서를 추가로 작성하며 비슷한 기분을 여러 번 느꼈다. 아직도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같은 질문 항목이 남아있는 기업이 상당수였다. 가족의 학력과 근무처, 구체적인 직위까지도 기입하도록 되어있었다. 종교와 혈액형, 신장, 체중, 시력 등 개인적인 신상정보를 묻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취업 커뮤니티에서도 공채 시즌이 되면 이러한 기업의 ‘갑질’에 분노하는 이들이 많다. 한 취준생이 이력서 작성 중 아버지 직장과 직위를 쓰라고 해 기분이 언짢다는 글에 많은 이들이 ‘군번까지 쓴 적이 있다’, ‘어이없게도 그런 기업이 상당하다’, ‘업계 1위 기업인데 혈액형을 쓰라고 해 놀랐다’는 등의 댓글을 달았다.

박수현 조은에듀케이션 실장은 “실제 기업에서 채용을 했던 경험에 비춰볼 때 개인정보를 알게 되면 그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라며 “개인정보를 정식 채용 프로세스에 노출하는 방식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지원자가 빈칸으로 남겼을 경우 면접에서 다시 물을 여지가 있다”며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문항이라면 애초에 기입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취준생 김 모 씨는 하반기 L기업의 자소서를 작성하다가 입사 지원을 포기했다. 자소서 문항 중 구체적인 사업 아이디어를 제안하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사업 아이디어를 내라는 자소서 문항이 황당했고, 취준생의 다급한 심정을 악용한 기업의 ‘갑질’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을 회사 측에 문의한 결과, L기업 관계자는 “해당 문항은 지원자가 회사나 산업군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도를 보고자 하는 취지로 아이디어, 생각의 흐음, 사업가 정신 등을 평가하기 위한 문항”이라며 “해당 문항의 아이디어는 개인정보로 분류돼 채용 과정 후 폐기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취준생의 아이디어를 자소서 항목에 넣은 기업은 L기업뿐만이 아니다. H기업의 자소서 항목에는 ‘애플리케이션 아이디어를 제안하라’는 내용도 있다. 자사 직원들을 위한 애플리케이션을 만든다면 어떤 것을 만들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내라는 것이다. N기업은 자사 사업과 관련된 바이럴 마케팅 방안을 제안하라는 것을 자소서 문항에 포함시켰고, Y기업은 제품, 전력, 판매 채널 등 당사의 사업 영역과 관련한 발전방향 아이디어를 제시하라고 했다.

박 실장은 “지원자가 낸 아이디어가 당장은 아니더라도 추후 사업 아이디어의 씨앗이 될 여지가 분명히 있고 이를 악용하는 기업도 있다”라며 “사업과 관련된 아이디어로 평가를 하려면 관련 분야의 공모전 경험을 묻거나 관련해 작성했던 것을 포트폴리오로 제출하라는 방식이 올바른 방향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끝) / phn09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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