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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장판사가 병역거부 판결 바꾼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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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상 지식사회부 기자) “모두가 전쟁하지 말자는 신념을 갖는다면, 정말 전쟁이 사라지지 않을까?”

유토피아적이고 황당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실제 이런 생각을 토대로 판결을 바꾼 판사가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병역법상 처벌해야 하는가를 놓고 지난달 30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사진)에서 언급된 한 부장판사인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날 공개 변론에서 조재연 대법관이 피고인측 변호인에게 “종교와 신앙 지키고자 군에 가지 않겠다는 신자 수가 늘어나면 군대가 없어지고 결국 국가가 침략을 받게 돼 종교와 신앙을 지키는 그 자체가 종교의 자유를 무너뜨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며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을 때였습니다.

변호인 측은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의 대체복무를 허용한 나라에서 신도가 얼마나 많이 증가했는지 살펴보니 증가세가 오히려 둔해졌다”며 “추론과 역사적 경험은 다르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변호인은 “만일 모두가 그런 신념 가져서 모두가 전쟁 안하는 상황 생기면 더 좋지않을까 생각한다”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동부지법 항소심(2심) 부장판사가 언급되는데요. 변호인은 “한 동부지법 부장판사는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결국 전쟁 없어야 하는 생각으로 (병역거부) 하는거면 모두가 그런 생각하면 전쟁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들어서 기존 판결 바꾸게 됐다고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부장판사는 이형주 동부지법 형사2부 부장판사(48·사법연수원 27기)입니다. 이 부장판사는 2017년 5월 24일 병역법 위반으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피고인에게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판사는 과거 같은 사건의 피고인 16명에 대해 징역형을 내렸습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이 그동안 내렸던 판결을 스스로 부정한 것입니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이 전쟁을 거부하면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의 생각도 일리가 있다고 보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기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의 자서전을 꼽았습니다. 국가와 국경을 초월한 휴머니즘과 세계 시민주의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는 실무가로서 실정법을 신봉했다면 이후에는 ‘더 큰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태도는 법관으로서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판사는 판례를 보고 판결을 바꾸는 것이지 자신이 읽었던 책이나 경험을 토대로 기존의 판결을 뒤집어선 안된다”며 “헌법에서 말하는 판사의 양심은 제 멋대로 판결할 양심을 말하는 게 아닌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날 공개변론에서도 조희대 대법관은이 “법관이 개인적 소신으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해서 또는 편의적으로 해석해서 대체복무가 아닌 무죄까지 하는 건 (잘못된 것)”이라며 “일반 다수의 여론도 그것까지 지지하는지 의문스럽고 설사 여론다수라 해도 헌법 개정없이는 여론에 따라갈 수도 없다”고 지적한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 부장판사의 이런 ‘튀는 판결’은 이전에도 사회적 관심을 받았습니다. 2014년 8월 22일 새만금에서 불법 조업하던 어선이 뒤집어져 선원 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당시 해경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선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주지법 군산지원에 근무중이던 이 부장판사는 이 구속영장을 기각합니다. 오랜 기간 해경 등 국가 기관이 불법 조업을 묵인하고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사고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어떤 방향이든 ‘소신’이 확실한 판사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법원은 이르면 10월 병역거부자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놓을 전망입니다. 이 부장판사의 ‘이상’은 대법원에서 인정 받을 수 있을까요.

k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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