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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연구원, '정권 코드'에 석학을 끼워 맞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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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경제부 기자) 지난 15일 산업연구원이 격주로 발간하는 i-KIET 산업경제이슈 최신호에 눈에 띄는 글이 실렸습니다. 한국 정부의 경제 정책에 관련해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가 보내온 기고문입니다.

영문과 국문 양쪽 버전으로 장장 35페이지에 걸쳐 실린 이 기고문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인 J노믹스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른바 J노믹스라는 새롭고 혁신적인 경제전략’ ‘J노믹스가 전세계에 만연한 문제들의 희망적인 해답이 될 수 있다’ ‘적극적인 경제활동 개입으로 한국은 미국에 비해 훨씬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등의 문장이 반복됐죠. 일부 언론은 기고문을 인용해 세계적인 석학인 스티글리츠 교수가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찬사를 보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을 접하고 고개를 갸우뚱한 게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세계적인 석학의 의견이긴 하지만 피부에 와닿는 경제 상황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지요. 산업활동 동향을 나타내는 지표들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고, 취업자 증가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3개월 연속 10만명대를 기록했습니다. 평소 토론회나 세미나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하는 얘기와도 정 반대였죠.

사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평소에도 적극적인 정부 개입과 분배정책의 신봉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답지 않은 ‘헛발질’을 할 정도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2013년 베네수엘라 은행이 주관한 강연에서 스티글리츠 교수는 “높은 인플레이션율이 꼭 해가 되는게 아니다”라며 “(베네수엘라가 펼친 적극적인 화폐 발행과 분배 정책으로) 석유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던 카라카스의 빈민들이 성공적인 교육정책과 보건정책의 혜택을 받게 됐다”고 했습니다. 베네수엘라 경제 구조를 높이 평가한 것이죠. 그 후 베네수엘라 상황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 같은 정책으로 1년새 물가가 6000% 오를 정도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국민들이 기본적인 생필품도 사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 같은 글이 실리게 됐는지 궁금해 졌습니다. 산업연구원 관계자에 따르면 해외 석학의 기고문을 싣는 코너는 작년부터 신설됐다고 하네요. 연초마다 한국의 경제정책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는다는 취지라고 합니다. 일부러 정부에 호의적인 의견을 낼 가능성이 높은 스티글리츠 교수를 선정한 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펄쩍 뛰었습니다. 해외 석학들이 워낙 바빠 기고문을 작성할 짬을 내지 못할 때가 많은데, 마침 스티글리츠 교수가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는 설명입니다.

해명을 듣고도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산업연구원이 스티글리츠 교수에게 ‘J노믹스에 대해 긍정적으로 써달라’고 부탁하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스티글리츠 교수가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호의적으로 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도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스티글리츠 교수는 석학 중에서도 좌파 성향이 뚜렷하다”면서 “당연히 정부에 우호적인 글을 싣기 위해 스티글리츠 교수에게 기고를 부탁했을 것”이라고 평했지요.

참고로 작년 산업연구원은 같은 코너에 에드워드 프레스콧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석좌교수의 기고를 실었습니다. 법인세율을 낮춰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내용이었죠. 스티글리츠 교수가 보내온 기고문과는 정 반대의 느낌입니다. 기고문이 실린 시기도 당초 취지에 맞는 1월 1일입니다. 스티글리츠 교수의 기고문은 5월이 돼서야 실렸죠. 산업연구원은 “스티글리츠 교수님이 워낙 바빠 기고문을 좀 늦게 보내오셨다”고 설명했습니다. 미리 기고문을 부탁할 석학을 정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니겠지요.

연구기관만큼은 정권과 관계 없이 독립된 목소리를 내야 할텐데요. 1년만에 기고문 성향이 정 반대로 바뀐 게 우연의 일치이길 바랍니다. (끝) /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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