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은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결하는 데도 요긴하게 사용된다. 수학자들은 기하학과 행렬을 이용해 항공기 기내 뒷자리부터 채우는 것보다 오히려 마구잡이로 탑승하는 게 빠르다는 결과를 얻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가 집대성한 기하학은 토지 측량을 위해 도형의 원리를 연구하면서 시작된 학문이다. 오래된 학문이지만 지금도 그 힘을 발휘한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인텔이 선보인 드론쇼도 기하학의 힘을 빌렸다. 하지만 기하학은 유독 한국에선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교육부가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기하학과 벡터를 이과 수학 출제 범위에서 빼기로 하면서 과학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교육부는 기하를 교과과정에는 남기고 수능 과목에서만 빼 학습 부담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반면 과학계는 “기하학을 수능에서 제외하는 것은 이공계 인재의 기초실력 문제를 떠나 미래 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달 2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주최로 ‘4차 산업혁명 시대 대한민국의 수학교육, 이대로 좋은가’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공간 인식하는 길잡이 교육 포기
권오남 한국수학교육학회장(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은 이날 주제발표 자리에서 “4차 산업혁명 핵심 기술로 불리는 인공지능(AI)의 딥러닝 기술도 행렬과 통계 외에 벡터 계산을 포함한 기하를 기본으로 한다”며 “현재 고교 1학년 학생은 공간 지각·표현 능력을 가르치는 기하 교과목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수능에서 기하를 빼기로 한 것은 학생의 학업 부담을 낮추고 사교육 부담도 줄이려는 의도다. 하지만 한국수학관련단체총연합회(수총) 등 수학단체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등 과학계는 정부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공간 사고를 기를 중요한 과목을 뺐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학생들의 수업 부담 경감을 이유로 수학 교과 내용은 계속해서 줄고 있다. 1979년 개정 교육과정에 있었던 행렬과 계차수열, 알고리즘은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선 사라졌다. 이공계에 진출할 학생에게 필수인 정적분은 개념을 빼고 계산법만 가르친다. 이번에는 공간 사고 능력 배양과 관련된 기하와 벡터 영역이 타깃이 됐다. 기하 과목은 2015년 이후 진로 선택 과목으로 분류됐다. 교육당국은 2022학년도 수능에 진로 선택 과목을 포함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권 교수는 “기하 단원은 3차원에서 벡터를 어떻게 하는지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유일한 과목”이라며 “한국 수학 교육 전반의 파행으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이 글로벌 트렌드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 심화 교과과정인 AP코스에서는 미분방정식, 테일러급수, 극형식함수, 벡터함수 등을 다루며 대학 입시에도 가산점을 준다. 일본 도쿄대 와세다대 등 주요 대학의 문과 지원 수험생은 삼각함수와 미적분, 벡터와 도형 공간 벡터 부분도 시험을 치른다. 영국과 호주, 싱가포르도 대학 입시에 기하 영역을 반영하고 있다.
캐나다 정부와 온타리오 주정부는 지난해 토론토에 1021억원을 들여 인공지능연구소를 세웠는데 이름을 벡터라고 정했다. 인공지능 연구에서 공간적 사고 중요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교육과정 남아도 파행 불가피
일부 교육 전문가는 기하와 벡터가 수능에서 빠졌을 뿐 교과과정에는 남아 있고 얼마든지 이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선 교사들은 그런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지적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윤상준 양명고 교사는 “학교 교육이 수능 중심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수능에 포함되지 않은 과목의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당장 대학 교과과정에도 여파가 미친다.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못하고 올라온 학생을 위해 관련 교육과정을 늘려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박규환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는 “최근 뜨고 있는 양자컴퓨터의 핵심인 중첩을 가르치려면 크기와 방향을 동시에 설명하는 벡터 합 개념으로 설명해야 한다”며 “벡터를 포기하고 크기만 이야기하는 스칼라만 배우는 건 1960년대 등장한 컴퓨터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수학자인 박형주 아주대 총장은 지금까지 학생의 수업 부담을 줄인다고 교과과정을 줄였지만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오히려 늘어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반문했다. 이를 되짚어보면 공부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왜 배우는 건지 동기 부여가 안 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학을 단순한 지식 도구로 보는 사고방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 총장은 “수학은 방대한 지식에서 결론을 끄집어내는 통찰의 힘을 기르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