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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37년 교편 접고 떠난 국가석학의 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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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환 지식사회부 기자) 지난 달 말 서울대에선 정년을 맞은 48명의 교수들이 퇴임식을 가졌습니다. 올해도 인문학에서 공학, 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거목(巨木)들이 긴 연구 인생의 한 막을 마무리했습니다.

정년퇴임 교수 명단엔 한국 나노과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국양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AT&T 벨연구소 10년, 서울대 27년 등 40여년의 연구인생을 나노 연구에 바쳤고, 그 결과 2006년 국내 학자 최고의 영예인 ‘국가석학’(star faculty)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화려한 연구 업적 만큼이나 그는 한국 연구계의 굵직한 자리를 맡아왔습니다. 2006년 그는 서울대의 연구정책을 총괄하는 연구처장을 맡아 ‘황우석 스캔들’에 대한 진상조사를 주도했습니다. 논문 이중 게재, 표절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내 최초의 ‘연구윤리 규정집’이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습니다.

2014년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 물망에 오르던 그는 국내 최대 민간 학술재단인 삼성 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으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정부 눈치 보지 않고 10~20년 뒤 ‘대박’을 칠 수 있는 후배 연구자들을 돕겠다는 취지에서입니다.

지난 달 22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국 교수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나 정년을 맞는 소회를 물었습니다. 한국 연구계의 문제부터 최근 대학교육 현장의 붕괴, 후배 연구자 및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그와 1시간에 걸쳐 나눈 이야기는 본지 2월 26일자 A33면 <국양 서울대 교수 “논문 하나로 세상에 기여하겠다는 꿈 밀고 나가야”>에 담았지만 종이 신문의 여건 상 축약이 불가피했습니다. 이에 인터뷰 전체를 정리해봤습니다.

▶정년을 맞는 소회는 어떻습니까

교수 정년이 65세인데 요즘 세상에 65세가 나이 들었다고 하면 안돼죠. 아무 것도 아니에요.(웃음) 1981년에 박사 학위를 받고 벨 연구소에서 10년, 서울대에서 27년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학자로선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학자 생활의 시작을 연구비 걱정할 것 없고, 지적 자극을 주는 사람들이 가득한 벨 연구소에서 지냈고, 서울대에서도 그랬구요. 서울대는 학자로선 한국에서 가장 많은 대접 혜택을 받는 곳이지요. 참 받은 게 많은데 그만큼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무엇이 가장 아쉬우신지요

한국 연구계의 폐쇄성을 깨보고 싶었는데...못했습니다. 미국에서 연구하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꽤 오랫동안 힘들었습니다. 미국은 지식 교류가 한국보다 훨신 개방적입니다. 교수들이 밥 먹을 때만 봐도 그래요. 미국에선 교수식당, 학생식당이 따로 없습니다. 큰 식당이 있고 연구자들이 전공이랑 관계 없이 섞여 앉는 게 자연스럽지요.

스몰 토크(가벼운 대화)가 정말 중요합니다. 가볍게 밥 먹고 커피마시며 만나서 얘기 나누는 것. 만나서 ‘넌 뭘 연구하고 있냐’ ‘이게 문제인데 이래서 잘 안풀린다’ 그런 얘기를 하다 영감을 얻는 거에요. 그렇게 식당에서 만나 다음날부터 같이 연구하게 된 사람들도 여럿 봤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왔더니 밥은 꼭 같은 과 사람들하고만 먹어요. 그리고 교수들끼리 만났는데 연구 얘기는 안해요. 그 대신 정치나 경제 얘기를 합니다. 학문의 발전사를 보면 자기 혼자만의 발전은 없습니다. 집단지성에 의한 발전이지요. 그런데 한국 교수들은 여전히 폐쇄적이고, 이상하게 쓸데없는 자신감만 있어요. 자신들이 최고라는 건데, 잘못된 거에요. 어떤 땐 고립감을 느꼈습니다. 글로벌한 정보의 교류에서 동떨어졌다는 느낌. 세상 돌아가는 것과 괴리돼 홀로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이죠.

▶한국 학계가 그 정도로 폐쇄적인가요

우리 사회의 특성인지도 몰라요. 자기들끼리 모여 자기 분야 얘기를 안하죠. 별종이라든가 외골수를 배척합니다. 어느 분야만 파는 교수들끼리도 그 중에서 자기 분야에 빠져 있는 사람을 외골수라고 생각하고 이상하게 여기니까요.

▶한국 연구계의 문제를 얘기해보죠. 한국 논문이 양적으론 성장했지만 질적 성장은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4년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을 맡게 된 게 그 이유입니다. 분명 한국 학계가 양적 성장이 필요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질적 성장으로 바뀌었어야 하는 시기는 이미 꽤 오래 전이에요. 그런데 아직도 과거 패러다임에 갖혀 있습니다. 한국 R&D(연구개발)예산 적지 않습니다. 지금 가진 자원으로도 충분히 더 잘 할 수 있어요. 부족한 것은 디테일입니다. 정권이 바뀌면 연구조직을 통합하고, 무슨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고, 연구소장을 바꾸고 이런 걸 반복한다고 연구력이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 디테일이 뭘까요

우선 한국 연구계엔 연구에서의 성공이 뭔지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 자체가 안 내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선 여전히 연구의 성공을 ‘연구비를 얼마 받았으면 논문이 몇 개 나와야 하고, 특허는 몇개 나오고 임팩트팩터(IF)는 얼마를 충족해야 한다’식으로 생각합니다. 연구 성공을 양으로 측정하는 방식이죠.

가끔 보면 학자들이나 언론이 정부를 탓해요. 양적 성장에만 치중한 제도로 발전을 막고 있다고 말이죠. 그런데 제 보기엔 정부는 죄가 없어요. 과기부 공무원들이 연구에 대해서 아는 게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처음에 잘 모르니까 학자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연구가 성공했다는 게 뭡니까’라구요. 그러니 학자들이 어떤 수준 학회지에 논문을 몇개를 쓰고 해야 연구를 잘 한 것이다 그렇게 말했지요. 공무원들은 그 말 듣고 제도를 만든 겁니다.

여기서부터 한국 학자들은 연구의 목적을 스스로 상실시켰어요. 논문을 왜 씁니까. 연구자가 논문을 쓰는 이유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그 전엔 사람들이 몰랐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죠. 특허는 세상 사람들에게 편리를 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구요. 한국에선 이들의 원래 목적은 실종되고 숫자 채우기만 남았어요. 양질의 논문을 정부 규제 때문에 못 쓴다? 학자들이 핑계를 대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한 예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왜 운전하기가 힘든지 아십니까. 택시 때문이에요. 택시 기사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수입을 올려야 하니 마음이 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한거죠. 그러니 차선 변경도 잦을 수 밖에 없고 신호 위반도 많이 합니다. 처음 운전하는 사람들은 택시를 엄청 욕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택시처럼 운전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택시 처럼 운전해야 한국 도로에선 손해를 안보거든요.

연구도 똑같습니다. 누가 한해에 논문을 20개 썼다. 5년간 100개를 썼다. 또 누가 특허를 얼마를 냈다. 그런 사람들이 승진하고, 연구소 단장 소장 자리에 앉습니다. 연구자들도 승진해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어야 할 것 아닙니까. 당연히 논문 많이 쓰는 게 롤모델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똑같은 사람들을 찍어내게 됩니다. 진득하게 난제 하나를 깊게 파는 사람은 한국 연구계에서 버티기 힘들어요.

그렇게 교수들이 연구의 목적을 잊어먹은 겁니다. 자연히 연구비를 지원하는 정부도 목표를 잃었어요. 왜 한국이 R&D 예산을 그렇게 많이 투입하는데, 그저그런 논문만 찍어내고 대박이 안 터지는가? 왜 한국은 노벨상을 못 받나? 이런 것 때문이에요.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에 간 건 ‘그걸 한번 부숴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 우물을 파는 연구자들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을까. 몇년에 얼마씩 논문 써야하고, 연구비 항목마다 꼬리표가 붙어있는 정부지원연구론 할 수 없는 일이었죠.

▶또 다른 문제점은 없습니까

평가 시스템이 또 다른 큰 문제입니다. 연구의 목적은 어떻게든 제대로 세웠다고 봅시다. 교수들이 좋은 연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치고, 그 이후에 제일 중요한 게 뭘까요. 좋은 연구를 하겠다. 제대로된 특허를 만들겠다는 사람을 알아주고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평가하는 곳이죠. 이 사람 아이디어가 좋다. 이 사람이 연구 제대로 하면 대박낼 수 있겠다는 건 그 분야 전문가들이 보면 바로 압니다. 전문 영역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슨 숫자로 딱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미국에선 교수의 임용에서 승진, 연구비 지원까지 모든 게 정성적으로 이뤄집니다. 어느 분야 권위자들이 ‘이 사람 가능성 있다’고 판단하면 그 사람이 그동안 논문을 몇개를 썼든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연구비 평가를 어떻게 합니까. 한국에선 명목상의 객관성, 공정성이 연구의 진정한 성과보다 앞섭니다. 어느 분야 최고 전문가의 연구비를 그 분야에 대해선 잘 모르는 다른 분야 연구자가 평가해요. 동향 사람은 또 평가에서 배제합니다.

한국처럼 좁은 나라에서 그렇게 다 지우다보면 남는 사람이 없어요. 전문가를 비전문가가 평가하다보니 이게 얼마나 잠재력이 높은지 낮은지 몰라요.

R&D 예산 배분도 전략이 부족해요. 전국의 이공계 연구자들에 대해 고르게, 적어도 최소한의 연구비가 없어 연구나 교육을 하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일종의 ‘웰페어’(복지)를 보장해주는 것은 필요합니다. 연구비라든가 조교비 같은 것들이죠. 그렇게 일정 수준의 교수 자리가 보장돼야 그 분야에 인재가 지속적으로 공급됩니다.

하지만 그것관 별개로 정말 어려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연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전략적 선택도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나 대학에서 노벨상 받을 연구를 할 필요는 없어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거죠.

언젠가 도쿄대 교수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에선 노벨상이 나와도 서울대, 카이스트, 포스텍 이 세 곳에선 안 나올 것 같다구요. 이 세 학교가 세계 순위 같은 건 제일 높은 대학이거든요. 그런데 왜 안 나올 것 같다고 할까요. 도쿄대 교수가 돌려서 얘길 한거에요. 너네들처럼 전략 없이 연구비를 복지처럼 뿌려선 절대로 노벨상 못탄다는 거죠.

▶한국은 노벨상 탈 수 있을까요.

노벨상은 좋은 논문을 쓴다고 주는 상이 아니에요. 좋은 논문은 넘쳐납니다. 사이언스, 네이처 그 외 내로라하는 논문들에 엄청 많은 논문들이 올라오잖아요. 그런데 노벨상은 단순히 임팩트팩터 높은 데 논문 냈다고, 피인용이 높았다고 주는 상이 아니에요. 정말 새로운 것. 그간 사람들이 생각 못했던 것. 20~30년 후 세상의 변화에 기여한 앞선 연구,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연구에 주는 거죠.

우리 나라 교수들 논문 실적 좋습니다. 네이처 사이언스에 논문 쓰는 게 옛날에나 대단한 일이었지 요즘은 한국 학자들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이처를 썼는데 독자적인 아이디어로 쓴 논문은 별로 없어요. 공저는 했지만 아이디어는 지도교수 것인 경우가 많은 겁니다.

문제는 네이처 사이언스마저도 이걸 많이 쓴다고 노벨상을 타는 건 아니란 겁니다. 한국엔 좋은 논문은 넘쳐나는데 좋은 아이디어는 없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네이처를 몇개 써야 서울대 교수가 된다. 그래서 언제까지 몇 개를 쓴다. 거기에만 빠져 있다는 겁니다.

우리 대학 구조가 그렇게 짜여져 있어요. 논문 숫자를 맞춰야 교수가 되고, 승진도 하고, 대학원생도 들어오죠. 그렇게 가시적 성과를 보여야 대학원생들도 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그를 바탕으로 제자들이 교수가 되잖아요. 외골수 같이 언제 빛 볼지도 모르는 연구에 매달리는 교수는 승진도, 연구비도, 대학원생도 안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학자들부터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 자기가 한번 해보겠다고 마음 먹은 주제를 못하고 따기 쉬운 주제에 매달려요. 그러니 한국에선 노벨상을 못 탄다는 겁니다.

▶교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저 나름대론 여기에 저항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돌아오고 나서 한국에서 갑갑함을 느꼈고 이것 해보자 저것 해보자 했죠. 그런데 혼자 힘으로 가능한게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 저부터도 한국 대학 문화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어요.

저 나름의 타협점을 찾긴 했습니다. 20년 전 정년 보장을 받고 나서, 그리고 10년 전 국가석학으로 선정됐을 때 이젠 정말 긴 호흡으로 한번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를 해보자. 그런 다짐을 했습니다.그래도 솔직히 얘기하면 아주 만족스럽겐 못했어요. 제가 길러내야 하는 제자들이 있고, 그 친구들 앞길도 열어줘야 하니까 저도 얼마만큼 논문량을 맞춰야만 했죠. 저 자신도 제 환경을 뿌리치진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라도 분위기 반전이 필요합니다. 10년 전에도 나왔던 얘기인데 안되고 있죠. 국내 모든 대학들이 다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고 봐요. 서울대가 앞장 서야 합니다. 서울대가 왜 존재할까요. 서울대만이라도 연구 본연의 목표를 되찾아야 합니다. 지금처럼 해선 5~10년 내에 서울대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될 겁니다. 문제가 터지면 사람들은 묻겠지요. 지금까지 뭘 했냐고요.

▶대학이 어떻게 방향을 제시해야 할까요

대학의 역할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대학은 그 흐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죠. 호흡이 길다는 건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 역할을 제대로 안하고 있어요. 연구비를 덜 받아도 교수들 다섯명 중 한명이든 절반이든은 그런 일을 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제라도 대학의 목표를 되찾아야 합니다. 정말 인류사를 바꿀 세상에 도움이 되는 단 한가지라도 기여할 연구를 하자. 아니면 세상을 바꿀 제자를 단 한명이라도 길러내자. 한국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면서 자신의 제자 그리고 그들의 제자까지 3대에 걸쳐 노벨상 수상자만 30여명을 배출한 영국의 J.J 톰슨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 연구도 연구지만 제자들을 제대로 길러낸 사람이죠. 한국에 톰슨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조셉 존 톰슨 : 영국의 실험물리학자. 기체방전의 연구를 하여 전자의 존재를 증명하였으며, 양극선에 관한 연구로 입자를 질량에 의해 분리시키는 방법을 창안하고 분석기를 제작하여 네온의 동위원소 분리에 성공했다.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지요. 요즘 교수를 비롯해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이 상당합니다

한국 사회는 언제부턴가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죠. 광우병에서, 부안 매립장, 탈원전 등 숱하게 많은 과학적 사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봐보세요. 한국에선 전문가를 믿지 않습니다.

전 2005년 황우석 사태가 그 계기라 생각합니다. 황우석 사태를 촉발시킨 것은 언론이었죠. 처음 학계는 황우석을 지켜주려고 했습니다. 그 전까지 학계는 비판도 의심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황우석 사태와, 치부를 어떻게든 숨기려던 학계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깨달은 거죠. ‘아 교수란 사람들도 속임수나 쓰고 치사한 인간들이구나’ 그 뒤로 사람들은 교수들의 연구부정을 뒤지기 시작했고, 외국 선진국에까지 ‘연구진실성’ 화두가 던져졌습니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시민들에겐 잘못이 없어요. 전문가들 탓이죠. 우리 시대의 지식이란 것은 컴퓨터 속에 다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보다 낫지요. 전문가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역할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세상에 제대로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죠. 스스로가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노력도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요즘 사이비 전문가들이 판을 칩니다. 세상 모든 문제에 답하는 사람들이죠. 진짜 혜안 있는 전문가는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를 숨겨놓고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불평하면 안됩니다. 정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 행동을 했어야지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65세는 정말 젊은 나이에요. 여전히 저보다 20~30세 많은 스승님들도 활발하게 활동하시는데 제가 나이 들었다고 연구를 안하고 할 수 없지요. 남은 삶 동안 정리하고 싶은 연구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초전도 중 고온에서 일어나는 초전도현상. 이게 왜 일어나는 지 그 원리를 알아내고 싶어요. 5~6년 전부터 매달린 주제인데 아직 알아내진 못했어요.

초전도란 건 금속이 저항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미 낮은 온도에서 초전도가 왜 일어나는지는 1980년대에 규명됐죠. 그런데 그 이상의 고온에서의 초전도현상은 그 원리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항이 없어진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한 예로 전기는 송전 과정에서 발전소에서 생산된 것의 60%가 사라집니다. 저항 때문이죠. 저항이 사라져서 손실률이 떨어지면 지금까지 10개 필요했던 발전소를 절반은 줄여도 되는 겁니다. 제가 직접 못 하더라도 이걸 규명할 창창한 후배들을 돕고 싶습니다.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대학엔 그저 지식을 얻으려고 오는 게 아닙니다. 지식은 컴퓨터 안에 다 있어요. 대학에선 지적 역량을 길러야 하는 겁니다. 지적 역량이란 건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어떠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집니다. 누군가와 그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창의적이 되죠. 인류사를 바꾼 혁신은 어느 산골에 혼자 사는 사람이 만들어낸게 아닙니다. 인간의 두뇌는 교류를 통해 발전합니다. 대학은 그 공간입니다.

대학은 지식 창출 공간이 아니라 창의적 지혜를 창출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대학의 역할은 학생들이 지혜를 길러나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변호사 변리사 공무원 같은 안정적인 직업 이상으로 창의적 지혜를 통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 더 가치있는 삶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대학 그리고 교수의 의무입니다.

요즘의 학생들에겐 미안합니다. 내 세대는 사실 쉽게 산 세대였어요. 나라가 작고 어려웠어도 팽창하는 나라였기에 기회가 많았죠. 그래서 학생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 거기에 천착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다만 저는 설령 그들의 최종 선택이 그러할지라도 학생들이 적어도 대학에서만큼은, 솔직힌 그 이후에도 머리 속 자산이 자기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이란 사실을 믿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표층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어떤 현상을 두세번 더 생각하고 철학하고 탐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자기 머리를 깨고 부수고 다시 붙이며 깨달아 나갈 때 창의력을 갖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현명한 사람을 자주 만나서 사람들끼리 부딪히고 싸우면서 성장하는 겁니다. 대학에서의 기회를 쉽게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끝) / jung@hankyung.com

오늘의 신문 - 2024.04.18(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