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취재 뒷 얘기

트렌드가 된 '러닝'...퇴근 후 달리는 직장인들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러닝,‘ 뜀박질’에서 워라밸 세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김영은 한경비즈니스 기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runner).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리 정해 놓은 묘비명이다.

본인을 작가이자 ‘러너(달리는 사람)’라고 정의할 정도로 ‘달리는 일’은 그의 인생에서 글쓰기만큼이나 핵심적인 행위다. 그는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이 달리기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무라카미 작가처럼 삶의 중요한 시간들을 달리기에 쏟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 일과 삶의 균형)이 2018년을 관통할 트렌드가 된 지금, 달리기는 ‘러닝’이라는 이름을 입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직립보행 이후 수천 년간 뜀박질을 해 온 인간인데 난데없이 문화라니…. 의아할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러닝’은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다. 러닝은 이제 자기표현의 수단이자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진화했다.

스포츠 브랜드는 앞다퉈 러닝 프로그램과 대회를 운영하고 있고 도심을 함께 달리는 ‘러닝크루’가 서울에만 수십여 개가 생겨났다.

◆러닝 문화 이끄는 ‘러닝크루’

대기업에서 일하는 문진수(32) 씨는 월·목요일마다 커다란 운동 가방을 챙겨 출근한다. 퇴근 후 그가 속한 러닝크루 ‘크루고스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미세먼지 경보가 울린 날에도, 섭씨 영하 14도의 한파가 몰려온 날에도 100여 명의 크루고스트 회원들은 달리기 위해 모였다.

회원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2016년 7월 2명으로 시작한 회원은 2018년 1월 기준 4800명이 됐다. 그중 90%는 직장인이다.

2030세대를 중심으로 모인 러닝크루는 러닝 문화를 이끄는 중심축이다. 퇴근하는 인파가 파도를 이루는 오후 7~8시. ‘러닝크루(모임)’가 활동을 시작한다. 러닝크루는 일종의 달리기 동호회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돈도 들지 않는다. 코스는 광화문이나 청담동, 한강 같은 도심이다.

김나선 아디다스코리아 러닝 BU 과장은 “과거 러닝 스포츠는 기성세대 중심으로 혼자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 즐거운 삶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주목받으면서 러닝의 인식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이어 “2030세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러닝크루는 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남들보다 멋지고 특별한 러닝 문화를 창출하며 러닝 인구를 급속도로 증가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평균 노동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자랑하는 한국의 직장인들이 퇴근 후 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건강한 취미를 즐기기 위해서다. 신철규 크루고스트 대표는 “러닝은 저녁 시간을 사수한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자 생활의 활력소”라고 말했다.

‘워라밸’이 2018년을 관통할 키워드로 꼽힐 만큼 삶의 여유와 행복이 중요한 가치가 됐다. 적당히 벌고 아주 잘살기를 희망하는 워라밸 세대에게 퇴근 후 저녁 시간은 자신만의 삶을 즐기는 시간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트렌드코리아 2018’에서 “워라밸 세대가 2018년 가장 강력한 인플루언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진) 소셜미디어를 타고 러너들의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런예인'이라 불리며 스포츠 브랜드의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로 떠올랐다. / 안정은씨 인스타그램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게 트렌드의 지표가 된 만큼 워라밸을 실천하고 있는 러너들은 소셜 미디어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직장인 안정은(27) 씨는 러닝계에서 ‘런예인(러닝+연예인)’으로 통한다. 주로 달리는 모습을 찍어 올린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2만 명이다. 당연히 스포츠 브랜드나 러닝 잡지의 후원이 줄을 잇는다.

스포츠 브랜드 입장에서 안 씨 같은 ‘런예인’은 러닝이나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확실히 겨냥할 수 있는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다.

◆체험 강화한 러닝 마케팅

러닝 열풍의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운동에 비해 진입 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수영이나 마라톤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러닝은 특별한 강습이나 복장 없이도 어디서든 즐길 수 있다. 러닝화 하나만 있으면 특별한 도구도 필요 없다.

스포츠 브랜드에서는 2~3년 전부터 러너들을 겨냥한 마케팅이 이어지고 있다. 스포츠 브랜드가 운영하는 러닝 전문 매장이나 러닝 프로그램도 러닝 열풍에 불을 지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각각 나이키런클럽(NRC)과 아디다스 러너스(AR)라는 러닝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스포츠 브랜드는 달리기 애플리케이션과 자체 마라톤 대회까지 열어 러닝에 관련된 모든 프로그램에 관여하고 있다.

나이키는 지난해 압구정 로데오에 러닝 콘셉트 매장을 열었다. 총 3개 층으로 1층에는 여성용 러닝 의류, 2층은 러닝화, 3층에는 남성용 러닝 의류 제품들로 구성돼 있다. 국내 러닝 제품 수요가 늘어났다는 증거다.

아디다스는 ‘마이런 서울’과 ‘마이런 부산’이라는 마라톤 대회를 매년 1회씩 개최하고 있다. 최근에는 젊은 여성들의 참가율이 높아짐에 따라 여성들만 참여할 수 있는 ‘우먼스’ 코스도 신설했다. 대회마다 2만여 명의 러너들을 모집하고 있는데 매번 짧은 시간 내에 접수가 마감된다.

아디다스는 러너들의 아지트도 운영하고 있다. 서울숲에 자리한 ‘아디다스 런베이스 서울’은 320㎡ 규모의 체험 공간이다. 서울숲 근처 달리기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제품을 대여해 주고 트레이닝 프로그램과 휴식을 선사한다.

김나선 아디다스코리아 러닝 BU 과장은 “영리가 목적이 아니라 아디다스 제품을 자연스럽게 체험하고 검증하며 러닝 문화를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런베이스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오늘의 신문 - 2024.04.20(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