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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새로운 시간과 승부하는 정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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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생활경제부 기자) 신세계가 또 한번 일을 냈다. 주 35시간 노동제를 도입하겠다고 8일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전혀 관련없는 하나의 사진이 떠올랐다. 캐나다 트뤼도 내각을 담은 사진. 2015년 사진이다.

30대부터 60대까지 나이와 지역을 안배했다. 원주민 부족 출신, 난민 출신도 있었다. 거물급 전직 관료도 있었다.

트뤼도 총리에게 한 기자가 질문했다. 이렇게 내각을 구성한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답은 단순했다.

“2015년이니까요.”

컨설턴트 유민영은 “트뤼도 내각은 동시대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캐나다의 인구 구성을 그대로 내각으로 옮겨왔다는 얘기였다. 유민영은 “정용진 부회장도 시대의 트렌드를 기업경영에 그대로 반영한 것 같다. 정용진은 과거 기준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기준으로 혁신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가 반영한 트렌드는 무엇일까. 정 부회장이 직접 개입해 만든 편의점 이마트24 슬로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편의점”

그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고 있는 지점을 찾아냈다. 일과 삶의 균형, 좋은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 등이 그것이다. 이를 기업의 전략으로 받아 안은 게 주 35시간 노동제다. 그는 이 숙제를 주저하지 않고 풀어냈다. 변화에 대한 발빠른 반응은 그에게 최초란 단어를 하나 더 선물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워라밸(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라는 표현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게 느껴진다. 여기서 라이프스타일과 함께 워크스타일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라이프스타일과 워크스타일을 하나로 합치려는 시도. 이를 통해 직원들의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단기적 손실을 감수하는 모험 등이 그가 반영한 새로운 시대의 트렌드다. 업을 규정하는데 익숙했지만 업의 스타일을 규정하는 것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한국사회에 그가 던지는 또다른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임금 하락없는 35시간 노동제. 이를 통해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한국 기업사에서 또하나의 벽을 허물었다.

'최소한의 경영’이라는 벽이다. 여기서 벗어난 첫번째 대기업이다.

국내 기업들은 그동안 법 테두리에서 일했다. 최소한의 원칙이었다. 법테두리 안에서 이를 지키는 선에서 경영은 멈췄다.

때로는 이 테두리를 벗어났다. 그래서 법을 지키는 준법경영을 회사의 목표로 걸어 놓는 우스운 일도 많았다.

하지만 정용진은 최소한의 경영 이라는 틀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사회적 논란에 대한 정용진식 대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주 40시간 근로시간 논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물론 제조업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를 인정해도 파격적인 것은 분명하다. 회사가 얻을 단기적 매출과 수익을 포기하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넘어선 것은 또하나 있다. 유통업에 대한 인식이다. 유통업은 오래전부터 낮은 임금, 열악한 근로환경 때문에 3D업종으로 취급받았다. 정 부회장은 이 인식에 도전했다. 몇년전부터 계속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했다. 이에대해 일부 사람들은 빈정거렸다. “유통업은 다 비정규직이나 다름 없고, 박스포장이나 하는 게 무슨 좋은 일자리냐”고 했다.

정 부회장은 이를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준비했다. 마치 “유통업이 좋은 일자리가 아니라구? 그럼 내가 보여줄게”라는 식으로 말이다. 1년이 넘는 동안 사회 변화를 연구하고, 시뮬레이션을 했다. 직원들이 만족하며 다닐수 있는 직장을 만들면, 생산성을 높여 적게 일하고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실험을 시작한 셈이다. 이를 통해 그는 유통업을 새롭게 규정하려고 나섰다.

아마도 그는 유통업을 새롭게 규정하지 않으면 유통전문 기업 신세계가, 한국의 서비스 산업이 더 이상 발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 한 신세계 간부의 말이다. “정 부회장은 가장 먼저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뒤쳐질 수 있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이번 선택은 ‘멋진 정용진’으로 보여지기 위해서가 아닌, 생존을 위한 절박한 시도라는 측면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직원들에게 그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지만 말이다.

“이마트가 멋진 이유는 항상 새로운 것을 가장 먼저 시도하고 가장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두려움 없이 도전해 달라”

정용진의 이번 실험은 성공할 지 실패할 지 아무도 모른다. 기업 생태계는 원래 그렇다. 변해도 죽고, 변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확률로 보면 변화가 변하지 않는 것보다 생존확률을 훨씬 높여준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는 평소 이런 말을 했다. “유통업은 사람이 곧 설비이고, 사람에게 쓰는 돈이야말로 투자이기 때문에 이를 비용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말로 해석하면 이번 투자는 대규모 투자를 통한 변화의 시도다. 이 변화를 직원들의 삶과 생각을 움직이는 길로 안내하는 것이 그의 앞에 남아 있는 숙제다.

경영의 거장들이 한 말을 통해 정용진의 새로운 시도를 평가해보면 어떨까.

“기업을 혁신한다는 것은 1~2년전에 비해 얼마나 신속하고 강해졌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세계에 비해 얼마나 신속하고 강인해졌는가를 부단히 자문자답하는 일이다” (잭 웰치)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점진주의는 적이다” (톰 피터스)

“거대한 조직일수록 점진주의에 중독되기 쉽다. 점진주의는 혁신의 최대의 적이다”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끝) /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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