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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대응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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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차완용 한경비즈니스 기자) 2017년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9447달러로 세계 32위에 올라 있다. 반면 태국은 6265달러로 세계 89위 수준이다. 6배가 넘는 경제력의 차이다.

하지만 태국에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여행객이다. 최근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보복에 따른 중국인 여행객 급감에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급격히 줄었고 면세점을 비롯한 관광산업과 자영업자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대표적으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던 명동은 중국인 여행객들이 자취를 감추자 매출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비해 태국의 방콕은 매년 1600만 명이 찾는 세계 제1의 관광도시의 위엄을 자랑한다. 현지의 활발한 길거리 문화와 다양한 음식 그리고 볼거리는 세계인의 발걸음을 모으며 ‘여행객의 성지’로 불리는 카오산로드도 형성됐다.

한국은 여행자의 거리라고 부를 만한 곳이 거의 없다.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입에서는 “한국은 인삼과 화장품 쇼핑밖에 할 게 없다”는 이야기만 들린다.

대표적 외국인 여행지인 명동은 이미 대형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커피숍 그리고 화장품 기업들이 장악했고 젊음의 거리 홍대마저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넘쳐난다.

◆ 강력한 태국 행정부의 문화 보존 정책

태국과 한국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일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한국보다 뒤처진 경제 환경이지만 태국은 지역별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특히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구도심 라따나코신 지역을 중심으로 투자는 허용하되 기존 건물이나 주변 환경을 헤치지 못하게 정부가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건축물 고도 제한이다. 라따나코신 등 주요 관광지는 1981년에 역사·문화 보존 지역으로 지정했고 왕궁 주변 지역은 왕궁보다 높이가 낮은 16m 이내로 제한했다.

그 외 지역도 20m 이상 높이 건축물의 건설을 금지했다. 이 정책은 시행된 지 이미 3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태국이 관광지 개발을 제한하는 또 다른 이유는 관광산업 때문이다. 최근 발표한 세계여행관광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태국의 관광산업은 지난해 2조9000억 바트(약 82억5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며 GDP 대비 20.6%를 차지했다.

총 5700만 명의 노동자 중 15%가 관광 관련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태국의 관광 수입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만 해도 전년 대비 13%나 증가했다. 아세안 9개 국가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태국 정부로선 국가 경제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관광지를 함부로 개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태국의 도시 개발 정책에도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프라의 노후화다.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건물은 낡았고 하수도에서는 악취가 올라온다. 이런 사실은 태국 정부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태국 정부는 1997년부터 ‘랏차담넌 종합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문화 자원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주요 관광 지역을 제외한 지역들의 도시 재생 사업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대규모 공사를 진행해야 하는 하수도 개발에는 아직 마땅한 방법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 원주민 이탈은 못 막은 절반의 성공

라따나코신 등 유명 관광지는 강력한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의한 원주민 이주 현상인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피하지는 못했다.

다만 건물이나 도로 등의 변화가 적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여행객이 많은 방람푸 지역은 유명 관광지로 소문나면서 원주민의 수가 줄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에서 새로 이주해 온 상인들이 건물을 임차한 후 개량해 상점을 열었다. 그들은 기존 건축물의 스타일과 형태는 유지하면서 레스토랑·게스트하우스·호텔 등의 용도로 개조했다.

새로운 주민이 원주민의 역할을 대체하는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사례는 최소한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보존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자본을 앞세운 도시 개발이 주를 이루면서 자본이 지역 상권을 장악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속수무책이다. 허름한 건물을 허물고 대형 건물을 올린다.

이렇다 보니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종래 상인은 떠날 수밖에 없다. 임대료가 비싸 들어올 수 있는 매장도 자본력을 갖춘 대형 프랜차이즈나 기업뿐이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선 똑같이 발생했다. 그 어느 번화가를 가든 비슷한 모양의 대형 건물 속에 똑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원래 주민도 떠나고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깔도 사라졌다.

도시 재생 과정에 젠트리피케이션 등 부작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자본을 들이지 않고는 도시 재생을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댄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줘야 한다.

하지만 도시 재생을 위해 단순히 자본만 투입해서는 사업이 추진되지 않는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도시 개발과 관련된 일정 권한은 지자체나 정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태국의 사례처럼 한국도 정부나 지자체가 개발을 조절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좀 나아질까.

이에 대해 크리스 햄넷 런던 킹스칼리지 지리학과 교수는 한 강연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란 현상은 늘 똑같은 형태를 취하지 않고 원인도 제각각이고 그 결과도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유시민 작가는 한 방송에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역사상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젠트리피케이션 열병’을 앓고 있고 앞으로 이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끝) / cwy@hankyung.com 출처 한경비즈니스 제11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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