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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이크 해줘" 7일만에 10만명 모인 '오싫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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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생활경제부 기자) “학창시절 오이가 들어간 반찬만 나와도 급식실 200m 앞에서 냄새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냉면이나 알밥에서 늘 오이를 빼야했던 그 기분...혼자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뭉쳐 ‘오이코패스’와 ‘오득권자’들에게 대항해야 합니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화제입니다. 얼마 전 만난 중년의 한 취재원이 “드디어 나의 취향을 오롯이 인정해줄 사람들을 만나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소개해준 페이스북 페이지가 바로 ‘오싫모’입니다. 오싫모는 개설한 지 일주일도 안돼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처음엔 그냥 애들 장난하는 건 줄 알았는데 사연과 사진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과 이들이 이렇게 진지하게 특정 음식을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연은 참 다양합니다. “어릴 때 오이 반찬이 학교 급식에 나오면 선생님이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했는데, 결국 코 막고 삼키다 구토를 하고 트라우마가 생겼다.” “오이 골라내고 먹다가 윗사람들한테 들키면 '넌 나이가 몇인데 편식을 하냐'고 꾸지람을 듣는다.” “냉면집이나 분식집에서 오이 빼달라고 하면 꼭 무시하고 다 넣어주는 데가 있다.” “나이 들고 편식한다고 놀림 당하기 싫어서 40년 넘게 냉면집 근처도 안갔다.” 등등.

오싫모가 생긴 뒤로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브로콜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버섯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가지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도 줄줄이 생겨났습니다. 유머도 넘칩니다. 누군가 오이채가 올라간 짜장면 사진을 올리면서 오이를 모자이크 처리한 뒤 “오자이크(오이+모자이크) 했습니다”라고 올리는 식이죠. 오이를 먹으라 강요하거나 오이 못 먹는 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오이코패스’ ‘오득권자’등으로 불립니다. 오이 싫어하는 것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건 ‘오밍아웃’이라 이름 붙었습니다.

오싫모는 트라우마의 치유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 오이 안 넣어주는 밀면집과 냉면집 등을 공유하고, 식성을 당당하게 이야기 하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변화도 생기고 있습니다. 김밥 프랜차이즈 ‘바르다김선생’은 오싫모가 화제를 모으자 오이가 들어가지 않은 ‘오이가 없네 김밥 2종’을 내놨습니다.

‘O싫모’를 집단적이고 일관적인 취향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군대식 조직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저항 현상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특정 음식을 싫어하는 것에 ‘편식’이라 이름 붙이고 소외시킨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겁니다. 오싫모의 한 회원은 “오이를 싫어하는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어른이 편식을 하면 무조건 부정적인 쪽으로 바라보는 분위기에서 자라왔다”며 “획일성을 강요하는 문화 속에서 당당하게 자기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고 서로 위로하는 모임으로 만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선언문 전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상을 원한다. 1. 냉면을 주문할 때 '오이 빼주세요'라고 말 할 필요가 없는 세상. 2.오이 걱정 없이 맘놓고 편의점 편의점 샌드위치를 살 수 있는 세상. 3.김밥에 오이를 젓가락으로 일일이 빼느라 김밥이 흐트러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 4.학교 급식에 오이가 나와 고통받는 청소년 어린이가 더이상 없는 세상. 5.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 우리는 서로 결속하고 힘을 모아 위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함께 투쟁할 것이다. (끝) /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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