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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자 1498명 "한국 기초과학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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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태 IT과학부 기자) 정부 연구개발(R&D) 정책의 근본 개혁을 요구하는 공개 청원 운동에 참여한 과학자가 1400명을 넘어섰다. 노정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와 호원경 서울대 의대 교수 등 과학자 40명이 지난달 23일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브릭)홈페이지에 기초과학 연구 위기를 언급하며 공개청원서를 올린 지 2주만인 지난 7일까지 서명에 참여한 과학자가 최종 1498명으로 집계됐다.

미래창조과학부는 2017년까지 연구자 스스로 주제를 정하는 자율 연구의 비중을 높이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미 지난달 29일까지 자필 서명을 보낸 494명 과학자들의 이름으로 지난달 30일 국회 청원서를 정식으로 제출했다.

서명에는 생명과학 분야의 세계적 신진 과학자로 손꼽히는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미국 하버드대와 존스홉킨스대 등 명문대와 캐나다, 유럽, 일본 등에서 활동하는 재외거주 한인 과학자들도 가세했다. 서명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정부가 제3차 과학기술기본계획(2013~2017년)에서 안정적 기초연구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현장의 과학자들은 과학 경쟁력의 자양분인 기초연구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며 “정부가 일일이 연구에 간섭하지 않고 연구자가 주도하는 창의적 기초연구를 확대하는 등 먼 장래를 위한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분야 과학자들도 “이대로 가면 기초과학 연구의 토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고 있다. 한 정부출연연구기관 책임연구원은 “이번 청원 파동은 생명과학에서 시작했지만 다른 기초과학 분야로 얼마든지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바른과학기술사회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한 포럼에서도 거품 낀 정부의 R&D 투자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지낸 박기영 순천대 교수는 이날 발제자로 나서 “한국 R&D는 절대 규모 기준 세계 5위로 총 63조7000억원에 달하지만, 이중 연구자 중심의 자유공모 과제는 1조원 규모”라며 “이 연구과제를 따내기 위해 연구자들 모두가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기초연구를 주도하는 대학의 연구 환경은 열악하다. 신진 과학자들의 유입이 늘어난데다 50~60대 과학자들이 늘면서 연구비를 타기 위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4년제 대학 전임 교원은 7만6750명으로 전체 한국의 연구인력의 4분의 1을 차지하지만 22%만이 정부 지원을 받고, 절반은 아예 본인이 관리하는 연구비가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기초과학 과제 중 80%는 5000만원 이하 소액 과제다. 그나마 이를 딴다고 해도 간접비 명목으로 학교에 20%를 내는 관행이 이뤄지면서 실제 연구에 사용되는 금액은 훨씬 줄어든다. 학생들에게 인건비를 주고, 실험실에서 쓰는 소모품도 사고 얼마 남지 않은 돈이 연구비로 쓰인다는 게 대학 연구실의 현실이라고 과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1억원 이상 과제를 따는 학자들 역시 지속적인 연구를 보장받지 못한다. 대부분 과제가 3년 이내 단기 과제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구자가 주제를 찾아 연구를 하는 자율형 기초연구에 대한 정부 투자가 절대적으로 작다. 정부는 틈나는 대로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1위라고 홍보한다. 하지만 이 중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60% 이상이다보니 투자액이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기초연구비 투자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국가 R&D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2009년 11%에서 지난해 9%로 줄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로 떨어졌다. 대학에 투자되던 R&D 예산 약 1조3000억원이 5년새 증발한 셈이다.

정부의 실적 부풀리기도 과학자들의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2017년까지 전체 R&D 예산에서 기초연구 투자비를 40%로 끌어올리는 목표를 내놓고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올해 정부 R&D 예산 기술분야별 투자현황을 분석한 자료에는 기초과학 비중은 6%에 머물고 있다. 반면 국책 연구가 대형화하면서 R&D 예산 60%가 6%의 과제에 집중되고 있다.

미국은 기초연구비에 정부 R&D의 47%를 쏟아붓고 대부분 연구 과제도 과학자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연구 목적도 보건환경 분야를 제외하고 특별한 목적이 없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과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은 아예 정부 R&D의 30%를 정부가 구체적인 항목을 지정하지 않고 대학에 블록펀딩 형태로 지원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정부 R&D 사업의 50%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연구에 집중되는 개발도상국형 모델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이는 이 분야 비중이 20%에 불과한 과학 선진국들과 비교된다. 그만큼 경제적 효과만 따지다보니 게임의 룰을 바꾸는 창의적 연구보다는 추격형 연구, 단기 성과형 연구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경제 발전 목적의 R&D는 기업 R&D에서 담당하게 하고 정부는 과학자들의 비목적 연구와 보건 환경 분야에 투자하는 선진국형 모델로 거듭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자유공모 방식의 기초연구 사업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기영 교수는 “정부가 기획하는 '주문형 연구사업'(톱다운 방식)의 비중을 줄이고 연구자가 과제를 정하는 연구사업(바텀업 방식)에 예산을 적절히 배분하고 대학에 주는 일반 지원금을 늘려 대학이 자체적으로 연구개발 기획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끝)/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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