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지면기사

베트남 국수 여행, 하노이 '분짜' 향 따라가면 어느새 노천 의자에 앉아…오늘은 속이 확 풀리는 매콤한 '분보후에' 한 그릇 어때?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조용히 국수를 먹고 싶은 날엔 호안끼엠 호수 주변으로
간판에 'Pho Gia Truyen' 써 있다면 믿고 먹어볼 만

번번이 베트남행 항공권을 끊는다. 사람들은 왜 그리 자주 가느냐고 묻는다. 처음엔 좋은 사람들, 아름다운 풍경, 오래전 추억이 있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대답한다. ‘국수’ 때문이라고. 베트남에는 표정, 맛, 색깔이 다른 개성 넘치는 국수가 가득하다. 음식은 여행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음식보다 포근한 품을 지닌 베트남 국수는 그 자체가 여행의 이유가 된다.

삶이 담긴 국수를 만나는 ‘비밀의 시간’

베트남에선 꼭 아침에 길을 나서곤 한다. 베트남 국수를 만나기 좋은 시간이 오전 6~7시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삶과 그 속에 숨은 보물을 엿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은 이른 아침, 거리 곳곳에 보이는 작은 노천 음식점은 거의 다 국숫집이다. 직장이나 학교로 가기 전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먹는 아침 풍경이 나를 국수 여행자로 만들었다.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도 아침만은 온전히 베트남 사람들의 것이다. 골목 여기저기에 놓인 국수 솥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은 아침 풍경을 더 아련하게 한다.우리가 떠나는 이유는 그곳의 삶을 들여다 보기 위한 것이므로. 국수는 곧 그들의 삶이므로.


퍼(pho)는 베트남 국수의 시작

기후나 문화적으로 북부, 중부, 남부로 나뉘는 베트남은 음식도 자연스럽게 세 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부의 하노이에는 36개 거리가 얽히고설킨 옛시가지가 있다. 베트남 북부의 거의 모든 국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은 퍼다. 베트남 쌀국수인 ‘포’의 현지 발음이다. 하노이의 대표 국수 퍼는 하노이 외곽 남딘에서 시작됐다. 남딘 사람들이 하노이로 올라와 퍼를 퍼뜨렸다고 한다. 하노이의 유명한 퍼 식당 주인 중에 남딘 출신이 많은 이유다. 간판에 퍼자쭈엔(Pho Gia Truyen)이라고 써 있다면 믿고 들어가도 좋다. ‘남딘에서 올라와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집의 퍼는 더없이 진하고, 어떤 집은 투명하며, 어떤 집은 혀를 사로잡는 강렬함이 있다.

조용히 국수를 먹고 싶은 날은 호안끼엠호수 주변 골목의 퍼집을 찾아가곤 한다. 그릇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맑은 국물에 생강을 얹어 준다. 처음 방문했을 때 소년이던 종업원들은 이제 듬직한 청년이 돼 조용히 국물을 부어준다.

채소와 소고기를 넣고 볶아 먹는 퍼싸오보(Pho Xao Bo) 역시 가게마다 특징이 있다. 어떤 식당은 고기를 부드럽게 볶아서 얹고, 어떤 집은 면과 고기의 물기를 바싹 말리면서 볶아 쫄깃한 식감을 낸다. 하노이에는 맛있는 퍼집이 많아서 여러 가지 퍼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베트남에서 펼쳐지는 국수의 대향연

하노이 거리를 걷는데 분짜(Bun Cha) 냄새가 발길을 붙들었다. 숯불로 고기를 굽는 근사한 내음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숯불향을 입은 고기에 절인 파파야를 더하고, 달콤하게 양념한 느억맘(생선액젓) 소스에 분을 적셔 먹는 것이 분짜다. 망설이는 모습을 본 주인이 작은 목욕탕 의자 하나를 내민다. 먼지 폴폴 날리는 길거리 식당이라는 사실도 잊고 금방 분짜의 맛에 푹 빠져 버렸다.

분(Bun)은 한국의 소면과 비슷한 굵기다. 같은 쌀면이지만 퍼의 납작하고 넓은 면발이 주는 느낌과 사뭇 다르다. 순하고 섬세하게 입안을 자극하는 분은 다양한 재료와 어우러져 북부의 대표 국수들을 탄생시켰다.

분의 종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베트남식 소시지를 얹은 분목(Bun Moc), 토란대가 그릇을 가득 덮는 연두색 분족뭉(Bun Doc Mung), 게를 껍질째 갈아 넣은 분지에우(Bun Rieu), 우렁이 두부 토마토 바나나가 어우러진 분옥쭈오이더우(Bun Oc Chuoi Dau), 튀긴 두부랑 먹는 분더우맘톰(Bun Dau Mam Tom), 가물치 살을 굽고 분과 함께 먹는 짜까(Cha Ca), 튀긴 생선살을 얹은 분까(Bun Ca), 닭고기 표고버섯 계란지단을 고명으로 얹는 분탕(Bun Thang), 땅콩을 듬뿍 넣은 소고기 비빔국수 분보남보(Bun Bo Nam Bo) 등이다.

하노이에서 시간이 부족하다면 36거리 중 밧단 거리로 가면 된다. 맛있는 음식점이 모여 있고, 모두 유명한 맛집이라 어떤 곳에 가도 하노이 국수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입안을 자극하는 매콤한 중부 국수

베트남 중부 도시의 국수는 매콤해서 속을 시원하게 풀어 준다. 중부 대표 도시이며 옛 수도인 후에에는 도시 이름이 붙는 분보후에(Bun Bo Hue)가 있다. 소고기 고명과 생채소를 얹어 먹는 매운 쌀국수 요리로 라임, 채친 바나나 꽃, 다양한 향채(香菜)를 넣어 국물까지 싹 비우면 속이 확 풀린다.

후에의 낌롱 거리엔 또 다른 국수인 분팃느엉(Bun Thit Nuong)이 있다.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와 채소를 섞고 된장과 비슷한 뜨엉(Tuong)을 베이스로 한 구수한 소스에 비벼먹는 요리다. 까록이라는 생선을 넣어 먹는 바인까인까록(Banh Canh Ca Loc)은 바인까인이라는 특별한 면을 사용한다. 동그란 관에 반죽을 붙여서 중국의 도삭면처럼 썰어 넣는 면발이다. 타피오카 성분이 든 가루를 사용해 쫄깃쫄깃하다.

게살을 완자로 빚어 넣고 걸쭉하게 끓여 면 위에 부어 먹는 바인까인남포(Banh Canh Nam Pho), 삶은 재첩을 얹어서 채소와 비벼먹는 분헨(Bun Hen)도 별미다. 중부지방 국숫집 테이블의 공통점은 빡빡한 고추기름 소스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 이 마법의 붉은 소스를 국수에 넣으면 누구나 푹 빠져든다.

심심하지만 오래 기억되는 맛

후에에서 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다낭과 호이안은 최근 떠오르는 여행지다. 이곳에도 독특한 국수가 있다. 두 도시 모두 행정구역상 꽝남지방에 속한다.

다낭의 국수인 미꽝(Mi Quang)은 미(Mi)라는 노란색 쌀면이며 ‘꽝’은 꽝남 지방을 의미한다. 노란 면에 새우와 돼지고기, 자작하게 부은 소스, 구운 라이스페이퍼나 튀긴 새우과자와 먹으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호이안의 옛 거리는 밤까지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그러나 이른 아침 문 닫힌 거리는 조용하기만 하다. 아침 산책길에 내처 시장에서 호이안 대표 국수인 까오러우(Cao Lau) 한 그릇으로 아침을 담백하게 시작해보자. 까오러우에는 툭툭 끊어지는 독특한 식감의 면발이 들어간다. 잘 조린 돼지고기 몇 점, 호이안의 싱싱한 채소와 비비면 소박한 한 끼가 완성된다. 오토바이 경적 소리와 예쁜 꽃을 싣고 달리는 자전거들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국수를 먹으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다양한 미각을 깨우는 남부의 국수

베트남 남부의 국수는 조금 더 복합 미묘하고 때로는 달콤하다. 베트남 남부 지역은 메콩 강과 바다에서 나는 싱싱한 재료들로 만든 음식으로 가득하다. 후띠에우라는 반건조 면을 데치고 새우와 돼지고기 고명을 얹는 후띠에우남방(Hu Tieu Nam Vang)이 호찌민의 대표 국수 중 하나다. 후띠에우남방의 ‘남방’은 크메르인이 사는 캄보디아를 말한다. 그러나 캄보디아에는 이런 국수가 없다. 베트남인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형태를 바꿨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띠에우남방을 보면 베트남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시절이 떠오른다. 오전 수업이 끝난 뒤 나무 그늘이 천장인 노천 식당에서 국수를 맛보던 기억. 강의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눈부시게 파란 열대의 하늘, 아이들이 황금비율로 양념해 준 후띠에우남방과 함께한 아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달콤새콤, 때로 바다의 비릿함이 느껴지는 남부의 음식들은 미각을 깨워준다. 푹 끓인 소고기 스튜에 면을 말아먹는 후띠에우보코(Hu Tieu Bo Kho), 퍼보코(Pho Bo Kho)는 강렬한 향신료가 매력적이다. 코코넛밀크로 만든 달콤한 커리에 분을 적셔 먹는 분까리(Bun Cari), 짙은 젓갈 내음을 풍기는 분맘(Bun Mam), 우동처럼 굵은 면을 넣어 먹는 바인까인짱방(Banh Canh Trang Bang), 튀긴 스프링롤을 잘라 넣고 오이 등의 채소와 함께 상큼하게 비벼 먹는 분짜조(Bun Cha Gio)도 맛있다. 바닷가 휴양 도시 냐짱(Nha Trang)에선 생선살과 해파리를 함께 넣은 분까쓰아(Bun Ca Sua)가 유명하다.

노천 식당에서도 취향대로 당당하게

베트남 국숫집에선 누구나 당당히 자신의 취향에 따라 국수를 주문한다. 좋아하는 고기 부위만 콕 찍거나, 파를 빼거나 면을 따로 달라거나, 함께 나오는 채소를 데쳐 달라고도 한다. 아주 허름한 노천 음식점도 주문한 그대로 만들어 준다. 나만의 취향을 반영한 뜨거운 국수 한 그릇을 먹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속에는 따뜻한 무언가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베트남에는 아직도 맛보지 못한 국수가 많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국수는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 국수는 또 나타난다. 지금까지 당신이 아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무심히 다가와 놀라게 한다. 아, 나의 베트남 국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추천 베트남 국수집

베트남에선 주소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기 쉽다. 각 도시에 들렀을 때 이왕이면 맛집을 찾아가보자. 맛있는 베트남 국수의 세계가 활짝 열린다.

◆하노이 밧단 거리

-퍼보 : 49 Bat Dan, Ha Noi

-분지에우 : 25A Bat Dan, Ha Noi

-분족뭉 : 18 Bat Dan, Ha Noi

-퍼싸오보 : 45 Bat Dan, Ha Noi

◆후에

-분보후에 : 17 Ly Thuong Kiet, Hue

-분헨 : 17 Han Mac Tu, Hue

-분팃느엉 : 52/11 Kim Long, Hue

◆다낭, 호이안

-미꽝 : 1A Hai Phong, Da Nang

-까오러우 : 27 Tran Phu, Hoi An


◆냐짱, 호찌민

-분까쓰아 : B2 Chung Cu Phan Boi Chau, Nha Trang

-후띠에우남방 : 46 Vo Van Tan, Ho Chi Minh

진유정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 저자 nauan@naver.com

오늘의 신문 - 2024.04.25(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