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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 김종인의 비정본색(非情本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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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태 정치부 기자) 김종인(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은 절대군주를 뜻하는 ‘차르(czar)’란 별명으로 불린다. 당 투톱인 4선의 이종걸 원내대표가 테러방지법 직권상장에 반대해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강행의지를 굽히지 않자 자신의 보좌관인양 꾸짖는가 하면 ‘조자룡 헌 칼 쓰듯이' 중진의원들을 컷오프(공천배제)시키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민주'를 당 간판으로 내건 60년 야당 역사에서 가장 독재적인 당 대표의 출현이 놀랍다. 수년간 야당을 취재한 기자에게는 모든 의원들이 ‘고양이 앞에 쥐’처럼 납작 업드려 있는 모습도 생경하다. 김한길 박영선 문재인 등 전 대표를 시도 때도없이 흔들어대던 ‘당대표 수난사’를 수 없이 목격해서다. 국회의원의 생사여탈권이 걸린 공천권 때문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공천권만으론 그의 ‘차르행보‘가 묵인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종인은 안철수(국민의당 상임대표)가 ‘임시사장'으로 비꼬았을 정도 당내 지분이 없다. 5공화국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2012년 박근혜 대선캠프의 경제민주화추진단장 등 그의 대부분 경력은 트집잡기 좋은 흠결요인들로 넘쳐난다. 이런 김종인이 ‘콩가루 집안'으로 불렸던 더불어민주당을 순식간에 장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더민주 비대위원중 한명은 최근 기자를 만나 “안철수 탈당 등 분당사태로 당 전체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김종인의 정치적 ‘내공’때문에 모두들 꼼짝도 못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비대위원이나 참모들이 특정사안에 대해 이견을 내도 "내가 생각이 있다" "두고보면 알거야"라고 묵살되는 일이 많다. 그래도 큰 반발이 없는 것은 김종인의 수가 대부분 먹히고 있어서다.

가령 테러방지법에 맞선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 중지결정에 대한 당내 반발에 “내게 생각이 있다"고 했다. 김종인은 이튿날 국민의당에 통합을 전격 제안하면서 필리버스터로 달궈졌던 정국을 순식간에 총선이슈로 바꿔버렸다. 바둑처럼 정치에 급수를 매기면 9단에 손색없는 현역 정치인중 한명일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왔다.

초대 대법관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친손자로 어려서부터 정치를 보는 눈을 자연스럽게 습득했고, 한국 정당정치의 산증인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등이 그의 정치적 자산이됐을 것이란 설명도 곁들어졌다. 대표실 한 당직자는 “야당 의원 개개인의 장단점과 신상명세, 지역구 경쟁력을 모두 꿰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인적 네트워크가 폭 넓고 그동안 ‘뒷방 노인네'로 지낸 것이 아니라 현역 정치인들과 꾸준히 교류해온 것 같다“고 말했다.

김종인은 당권을 잡은후 중도보수층을 흡수하기 위해 ‘우(右)클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박정희 이승만 등 전직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가 하면 대북 햇볕정책과 노동문제 등 야당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거침이 없다. 특히 당내 주류 인사를 컷오프 시키는 ‘비정함’에 주변에서는 혀를 내두른다. 대표적인 희생양이 바로 강기정(3선)과 정청래(재선)다.

강기정과 정청래는 당 안팎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들이다. 둘은 ‘폭력’과 ‘막말’의원의 대명사로 여론의 질타를 받지만, 두터운 열성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또 안철수 탈당후 당이 분당위기를 겪었을때 당을 꿋꿋이 지켰을 뿐만 아니라 문재인의 바통을 이어받은 김종인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탠 공로도 인정받고 있다. 국보위 참여 전력 등을 문제삼아 광주 시민 재야단체들이 김종인의 5.18묘지 참배를 결사반대했을때 중재자로 나선 이가 강기정이었다.

강기정은 자신을 컷오프 시킨 2월 26일 9번째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로 본회의 단상에 올라 “여당의 직권상장에 몸으로 저지하는 것 말고는 야당이 할수 있는 일이 없던 때가 있었다"며 ”지금처럼 필리버스터가 있었다면 폭력의원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폭력의 대명사인 강기정이 당의 정책위의장으로써 만성적인 국가재정적자를 초래하는 공무원 연금법 협상을 이끌어 개정안을 통과시킨 주역중 한명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 소득대체율(연금가입기간 중 평균소득을 현재가치로 환산한 금액대비 연금지급액으로 연금액이 개인의 생애평균소득의 몇 %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비율) 인상 조항때문에 국민연급법 개정안이 평가절하되기는 했지만, 공무원노조를 설득하고 무엇보다 “연금 협상테이블에 다른 법안을 절대 연계시킬 수 없다"는 소신으로 야당 원내지도부와 맞서 협상을 통과시킨 1등 공로자는 바로 강기정이었다.

당시 여당 협상파트너였던 유승민 원내대표와 당시 원유철 정책위의장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학생운동권 출신의 강기정은 4.13총선 승리를 위한 김종인의 포석에서는 처음부터 빠져 있었다. 광주의 특수성과 당에 대한 강기정의 헌신적 공헌 등 당지도부의 반대에도 김종인은 눈하나 깜짝 하지 않고, 자신이 광주를 방문한 당일 강기정 공천탈락과 발표를 직접 지시내렸다.

정청래도 김종인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당대포' '최전방 공격수'를 자처하면서 막말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청래는 지역구에서 여당 후보에 비해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동료 의원들은 물론 야당 지지층까지 결집해 항의 집회 등 '정청래 구하기'가 한창이지만 결정이 뒤집힐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 강기정과 정청래의 탈락 배경 등을 묻는 질문에 김종인은 "그분들에게 사감이 없다"고 짧게 답했다.

총선승리를 위한 대승적 차원이지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 차원이 아니란 얘기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표정의 짧은 발언속에는 승리를 위해 여론을 철저하게 따르고, 그 여론이 오해에서 비롯됐을지라도 유권자 눈높이에서 반영하겠다는 정치 9단의 ‘비정본색’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끝) /mrhan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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