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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위해 형제를 죽이다 ① 오스만투르크 제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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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1574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술탄 무라드3세의 즉위에 앞서 이스탄불 시민들은 가슴 먹먹한 장면들을 봐야 했다. 선왕의 관이 술탄의 궁전에서 하기아소피아에 위치한 무덤으로 이동하는 행렬 뒷자락에 5명의 어린 왕자들의 관이 뒤따랐던 것이다. 1595년 메흐메드 3세가 즉위할 때는 “19명의 무고한 왕자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끌려 나와서 신의 자비 속으로 들어갔다”고 당대의 역사가 페체비는 담담히 기술했다.

오스만 제국 관습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새 술탄이 즉위하면 동복, 이복,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술탄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형제살해’의 전통을 꼽을 수 있다. 이 전통은 왕위 계승권의 경쟁자를 제거해 왕권의 안정을 취하는 제도 중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아무 문제없이 왕위승계가 이뤄진 적은 거의 없었는데 근원적인 문제는 하렘조직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술탄들은 하렘의 신분이 낮은 첩들을 총애했고, 여러 첩의 자식들이 한자리 뿐인 술탄직을 놓고 경쟁해야 했다. 이에 따라 ‘정권 안정’을 위해 15~16세기가 되면 새로운 술탄이 등극한 바로 그날에 새 술탄의 모든 형제들이 교살돼 왕권 경쟁자들을 원천적으로 제거해 버렸다.

이 같은 형제살해의 전통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술레이만 대제 이후부터다. (엄밀히 말하면 술레이만 이전에도 형제간 권력다툼과 살해는 적지 않았지만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술레이만의 아버지 셀림1세 역시 치열한 권력투쟁 후 즉위한 뒤 두형을 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술레이만 대제의 애첩인 록셀라나의 아들 셀림과 이복형제인 바예지드가 왕위 계승 투쟁을 하게 되고 이 대결에서 셀림이 승리하게 된다.

패배한 바예지드는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곧 이란으로 망명하게 된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이란의 타마스브 샤는 바예지드와 그의 네 아들을 놓고 술레이만과 협상했다. 협상에 타결을 본 이란의 샤는 바예지드와 그 네 아들을 죽여서 돌려보냈다. 이와 동시에 어머니와 함께 부르사에 있던 바예지드의 다섯째 아들은 술탄의 사형명령으로 제거된다. 술레이만 대제가 자신의 후계자에게 걸림돌이 되는 다른 아들과 손자들을 모두 직접 처리했고, 셀림을 명실상부한 오스만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낙점한 것이다. 모든 경쟁자들의 씨를 말려 계승분쟁과 제국분열의 싹을 없앤 것이다.

이 같은 바예지드와 그 아들들에 대한 사형은 오스만제국의 왕위계승 법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술탄의 모든 아들들이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지방태수로 지배했고 모두 계승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바예지드 사후부터는 장자만이 계승권한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연장자 계승원칙은 깨지기 쉬운 규범이었고 이에 따라 형제살해의 광풍은 조건만 맞으면 계속 반복됐다. 형제살해는 정서적으로 대중적인 승인을 얻지 못했지만 “사형당한 형제나 형제의 인척들은 그들의 정신 속에 거대한 사악한 영혼이 자라날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으로 살해가 정당화됐다.

15세기에 메흐메드2세는 즉위 후 아직 갓난아기인 그의 이복형제를 죽인 후 “그는 아직 성장하지 않은 아이지만 경험 많은 원로들의 조언에 의해 사형이 결정돼 집행됐다. 불신과 잘못된 일의 나무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기 전해 그 뿌리를 뽑는 게 옳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16세기에 셀림1세와 메흐메드3세에 의해 법전조항이 추가된 유명한 메흐메드2세 법전은 형제살해를 법적으로 정당화했다. 법전은 “앞으로 나의 후손 술탄은 세계질서와 안녕을 위해 그의 형제들을 죽이는 게 합당하다. 대부분의 울람마들도 이것이 허용된다고 선언했다.”고 밝히고 있다.

셀림2세와 무라드3세, 메흐메드3세의 확고부동한 왕위계승에도 불구하고 형제살해는 계속됐다. 1574년 무라드의 즉위시엔 앞에서 상술했듯이 이스탄불 시민들은 무라드 아버지의 관이 무덤으로 옮겨지는 행렬에 5명의 어린 왕자들의 관이 뒤따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메흐메드 3세도 1595년 즉위하면서 대중들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십 수 명의 형제들의 피를 봤다.

이 같은 형제살해에 대한 대중의 반감은 커졌고 결국 형제살해 전통은 1603년 메흐메드 3세가 죽으면서 끝난다. 물론 도덕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우연(메흐메드 3세의 아들이 정신병을 앓았고 예니체리와 궁정각 세력 간 복잡한 세력다툼이 겹쳤다.)의 산물로 형제살해의 전통이 종지부를 찍게 됐지만 말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권력의 중독성에, 후계구도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하렘 제도라는 구조적 모순, 제국을 온전히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겹치면서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피로 피를 씻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돼서 쓰였던 것이다. (끝)

***참고한 책***

Colin Imber, 『The Ottoman Empire』, Palgrave Macmillan 2002

Francis Robinson (Edited),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the Islamic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문명사』, 김호동 옮김, 이론과실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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