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의 뉴스레터

이학영
‘물•당•모•합•전’의 추억 

“이 형, 우리 그룹 사보(社報) 봤어요?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1993년 어느 날로 기억합니다. 서울 태평로 삼성 사옥 앞을 지나가던 저를 발견한 삼성물산 임원 한 분이 갓 발행된 그룹사보 <三星> 표지를 흔들어대며 분개했습니다. 사보 표지 뒷면에 게재된 그룹 계열사 명단 맨 위에 ‘삼성물산’ 대신 ‘삼성전자’가 올라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발행된 사보에서는 물론, 그룹 내에서 “삼성의 맏형, 대표주자는 삼성물산”이라는 게 당연한 공식이었습니다. 그랬던 ‘서열’이 뒤바뀌었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습니다. 삼성그룹이 전자 금융 등 업종별로 ‘소그룹’ 제도를 도입하면서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전자소그룹을 맨 앞에 내세운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삼성전자가 D램 반도체로 세계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그룹을 대표하는 선두주자로 떠오르던 시절을 저는 이 에피소드와 함께 기억합니다.

저와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1980년대 중•후반, 삼성그룹의 신입사원 합동채용전형 합격자들이 근무 희망 계열사를 선정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물•당•모•합•전’입니다. ‘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제일합섬•삼성전자’의 줄임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삼성전자의 ‘서열’은 그렇게 보잘것없었습니다.

한국경제신문이 8월30일자 A26면에 보도한 [金과장 & 李대리] 기획기사 <삼성맨은 부럽다?…"회사만큼 잘 나가진 않아요ㅠㅠ">를 읽자니 20여 년 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기사에는 젊은 삼성 사원들이 강도(强度) 높은 회사의 업무 매뉴얼, 항상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근무 환경 등을 푸념하는 얘기들이 생생하고 글맛 나게 잘 정리돼 있습니다.

‘삼성맨’이라면 슈트를 입은 샤프한 모습이 떠오른다. 국내 재계 1위, 애플과 맞짱 뜨는 글로벌 기업 삼성에서 일하는 직장인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가 그렇다. 그러나 모든 삼성맨이 그렇게 멋지거나 잘나가는 사람은 아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회사가 잘나가지, 우리가 잘나가는 건 아니랍니다.”(기사 본문 인용)

잠시 감회에 젖었습니다. 제 또래들이 직장을 구하던 시절만 해도, 삼성의 어떤 계열사보다도 봉급이 많았던 한국IBM과 휴렛팩커드 같은 외국 제조회사 국내법인을 더 선망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삼성과 현대자동차, LG, SK 등 토종 한국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휘저으면서, 젊은이들의 입사희망 1순위 그룹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대한민국의 ‘경제영토’를 넓혀나가고 있는 이 땅의 직장인들을 응원합니다. 비바 코리아, 비바 김 과장 & 이 대리!

한국경제신문 기획조정실장
이학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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